1월, 2022의 게시물 표시

내게 두려움이 있어서, 나는 참 기쁘다.

이미지
장애를 안고 있는 이는 늘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보호자를 필요로 한다. 새롭게 여행할 장소를 모르는 이는 그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줄 네비게이션을 의지하게 된다. 앞으로의 주식전망을 몰라 두려운 이는 경제를 전망해 줄 수 있는 전문가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방이 칠흙같이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이는 내 눈을 밝혀줄 등불을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연약해서 늘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는 그분의 손을 한시도 놓지 않으며 늘 그분의 평강이 내게 임하여 달라고 간구한다. 그분은 평강의 왕 예슈아다. 내게 연약함이 있다는 것은 나를 비관하고 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게 연약함을 허락하신 주님의 이유는, 그 연약함이 느껴질 때마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일 때마다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실 예슈아를 찾으라 권하기 위하심이라. 그래서 나는 내 안 깊숙한 곳까지 당당하게 들여다 봄으로써 어둠을 발견하게 되면, 나의 죄성에 탄식하기 보다는 어둠을 밝혀줄 빛되신 예슈아께 나아가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시도 주님의 곁을 떠날 수 없는 그런 어린 아이와 같은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예슈아와 늘 함께 하는 나 자신을 느끼게 될 때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워줄 수 없는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노라.  그리고 내게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보게 하심은, 온전하게 알고 온전하게 보여주시는 주님을 갈망하게 하려 하심이구나.

내 어딜 가든지

이미지
  내 어딜 가든지 늘 나와 함께 하는 이가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지라도 항상 나와 함께 한다. 그렇기에 함께하는 그 순간만큼은 내겐 담대함이 생기며 기쁨이 충만하다. 내 아내다. 그녀는 자신의 평생을 두고 나만을 따랐다. 힘들때나 기쁠때나 그녀는 항상 내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엇일까? 내 평생을 두고 단언하자면, 그 고마움은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순 없다. 그저 감사하다 말할 뿐이다. 나와 늘 함께해 주는 그 자체만으로 나는 그녀에게 감사한다.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런데 어디까지??

이미지
자녀된 우리는 심지어 부모님이 불신자일지라도 순종해야 함이 옳다. 그러나 어디까지 순종해야 할까? 예슈아를 비방하는 많은 이들은 이 사실을 가지고 교회(공동체)를 조롱하기도 하며, 많은 성도들 역시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부모와 자녀간 신앙적 대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곤 한다. 이는 부모에게 복음이 전달되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인지 모른 채 당연한 것인양 자행되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다. 한 예를 생각해 보자. 한 가정이 있다. 부모는 범법자로서 살아가고, 그 자녀들은 그런 부모 믿에서 여느 가정의 자녀들처럼 살아간다. 어느 날 부모가 큰 아이를 부른다. " 이젠 너도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나를 따라 소매치기를 하자. " 부모가 그리 말할 때, (신앙을 떠나) 온전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라면 어떻게 답하는 게 옳은 것인지 안다. " 아버지. 저도 기뻐요.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측면이 강조된 상황에서 볼 때, 이처럼 답변하는 자녀의 모습은 참으로 좋은 태도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권하고 제안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분별》하지 않은 그 자체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사회가 규정하는 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종이라면, 이것은 모든 자녀의 마땅히 행할 모습이다. 그러나 사회의 규범 또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부분까지 이루어진 순종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같은 차이는 세상의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바다. 신앙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여야 함 역시 이와 같다. 12제자는 대제사상을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그 순종은 법 안에서의 순종이고, 법을 벗어난 상황에선 그들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 법은 무엇일까? 선한 양심( conscience ) 이다. 고린도후서 1장 12. ○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 은 우리 《 양심이

베드로의 배신 장면을 그대로 기록한 성경

이미지
막14:66 이하에는 '예슈아를 배신하였던 베드로의 모습'이 낱낱히 기록되어 있다. 믿음의 선진이요 영적 지도자에 속한 베드로인데, 할 수만 있다면 감추고 싶은 그의 부끄럽던 지난 날 모습들이 어쩜 그리도 꾸밈없이 민낯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걸까? 마가복음 14장 71.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베드로가 예슈아를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저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선 후보가 되면 숱한 비리의혹들이 들춰지는데, 당선됨과 동시에 조용히 묻히는 게 일상다반사요 사람들 간의 상식이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의 리더로 성장한 베드로일지라도 그의 치부를 감추지 않은 채 성경을 읽는 모든 만민에게 드러내어 알려주고 있다. 왜? 신앙의 선진이요 믿음의 선배라 하는 이들의 실체를 우리 모두에게 설명하기 위함 이다. 곧 그들의 근본이 뛰어났기 때문 에, 신앙의 선진으로 자란 것이 아님 !!! 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신앙의 천부적인 성품을 물려받은 특별한 가문이기 때문에, 혹은 태어나면서 창조주로부터 물려받은 영웅적인 성품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의 선배로 자라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이들의 성정이 같다. 곧 베드로의 제자 시절은 그야말로 (예슈아를 저주하기 까지) 개차반이었다. blog by conceptour | 하지만 개차반의 인생일지라도 성령이 임하시면 ……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 라면 누구든지 , 그는 주님이 인정하여 성경에 그 이름을 기록하듯 믿음의 선배로 자라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성경은 우리에게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우리는 힘주어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아무리 연약한 자라 할지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런 삶을 살 수만 있다면, 그의 이름은 능히 성경책에 기록될 수 있다. 당신의 죄가 주홍빛보다 붉을 지라도, 예슈아를 구주로 믿고 그의 가르침을 가르쳐 주어 예슈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령님과 동행하여 살아낸다면, 성경은 그

초신자가 노래를 잘하면, 그를 찬양인도자로 삼을 수 있다??!!!

이미지
  By family radio 316 교회(공동체)에서 대부분 열심을 내어 하는 바가 있으니, 그것은 누군가를 세워주는 것 이다. 특히 연약한 이들을 상대로 그들을 세워주는 행동에 대해 교회(공동체) 안에선 매우 선한 일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신앙을 처음 시작하는 이가 있고 그에게 어떤 재능이 있어 보일 때, 그를 곧잘 사역현장에 투입하곤 한다. 노래를 잘하세요? 그럼 OOO집사님을 따라 찬양을 인도해 보시겠습니까? 컴퓨터를 잘하세요? 그럼 OOO집사님을 따라 방송실 운영을 해 보시겠습니까? 이를 두고 '너무 선급한 결정'이라 말하면, 교회(공동체)는 세워주는 것에 힘써야 한다는 말로 자신들의 결정을 변호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재능이 있으시군요. 그럼 설교를 해 보시겠습니까?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By Bplans Blog 왜 유능한 영업 사원처럼 말 잘하는 이에겐 설교를 맡기지 않는 걸까? 누군가를 세워준다는 의미에서 찬양 인도자로 혹은 방송실 운영자로, 그리고 설교자로 세움받는 것이 다른 것일까? 설교자로 세우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말씀의 깊이를 모르는 자 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깊이를 모르는 자가 억지로 말씀을 풀어 해석하는 행동은 말하는 자신은 물론 듣는 이들에게도 커다란 해악을 가져오게 된다.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의 모든 서신에서도 이것들에 관해 그 안에서 말하였으되 그 안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 므로 배우지 못하여 불안정한 자들 이 다른 성경 기록들과 같이 그것들도 왜곡하다 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느니 라. 벧후3:15b~16.흠정역 그럼 노래에 재능은 있지만 찬양의 깊이를 모르는 이들에겐 어떻게 하는 게 지혜로운 결정일까? 아울러 컴퓨터에 재능이 있지만 교회(공동체)내의 방송사역에 대한 깊이를 모르는 이들에겐, 그리고 힘과 열정은 가득하지만 섬김이나 헌신에 대한 깊이를 모르는 이들에겐 어떻게 배려하는 게 지혜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