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복을 입은 者와 입지 않은 者




(마22:11~13)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예슈아께서 사용한 비유, 곧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는 내용이 기록된 말씀이다. 앞서 기술되는 내용들이 있지만 차치하고, 예복과 관련된 내용에 한해서만 함께 살펴보길 원한다.


손님으로 기꺼이 오겠다고 자진하여 참석한 이들을 향해 임금은 '손님이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할 바'를 두고 이야기 한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여기에서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옷(cloth)일까?


'enduma'(ἔνδυμα) by Beaute Magazine


마22:11에서의 예복은 헬라어 'enduma'(ἔνδυμα)로서 '밖에서 입는 예복'(apparel especially the outer robe)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밖에서 입는 예복이라는 측면에서 흔히들 옷(clothes)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의식을 위해 입는 지정된 복장이라는 의미의 '의복'(garment)의 의미가 더 합리적이다.


| 그럼 구약 성경에서 garment는 어떤 의복이었을까?


예후가 바알을 위하는 대회(성회)를 거룩히 열라 하매 드디어 공포되었더라(왕하10:20)


예후가 주관하려는 대회, 곧 성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에 3번 예루살렘 성전에 의무적으로 올라가야 하는 그 종교적 의식과 동급 수준을 뜻한다. 무교절, 칠칠절(오순절), 장막절(초막절) 대해 이스라엘 성인 남자라면 '참석하는 것에 대해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야 하고, 그 절기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그 절기에 참석해야 하는 의무감이 바로 성회다.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이와 같은 의무감을 가지고 바알을 섬기는 제사를 지내자고 북이스라엘 전역에 공포한다.


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다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주라 하매 그들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왕하10:22)


이때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 '예복'(lebush; לְבוּשׁ)을 입게끔 한다.


by snapdeal


lebush는 공적인 의미가 강조되어야 할 상황에서의 의복인 정장(apparel)을 가리킨다. 즉 전쟁터에서의 군인에겐 갑옷(armour)을 그리고 파티에 참석한 이들에겐 파티복(dress)이 되는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해 집 밖에서 행해지는 행사복(garment)을 뜻한다.


by Earthly mission


lebush는 labash라는 말에서 유래하는 데, labash는 창조주 야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던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labash or labesh;

וַיַּלְבִּשֵֽׁם

(창3:21)



by Early church history


labash란 죄를 지은 이들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야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그 사랑이 아니고서는 야훼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잘 안다. 그런데 잔치에 참석한 하객 중에 임금이 마땅히 입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 예복(lebush; labash)을 입지 않은 자가 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덮을 수 있다고 자인하는 자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a)


왜 자신의 행위로 천국 잔치에 참석하려 하는 것일까?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율법을 지켜행하는 그 삶을 강조하는 이들을 향해 지적하고 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그 무엇보다 강하게 대적한다.


| 성경을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등의 그런 삶을 거부하자는 게 아니다.

반대로 성경을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며 각종 예배에 전심으로 참석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보자는 의미다.


by I'm following Jesus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그 자체가 그릇된 방향을 향한 헛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롬3:20a)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율법의 행위를 하면 안 된다. 벧전4:8의 말씀처럼, 율법을 행하는 것은 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는 것으로 삼아야 한다.




십계명에서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제시된 8 가지의 '하지 마라'(Do not)는 계명을 지켜 행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는 절대로 의인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개인의 영달이 아닌)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이들로서 마땅히 나의 모든 율법적 행위를 쏟아붓어야 할 대상을 위해 마련된 2 가지의 '행하라'(Do)는 계명이 있다. 그 2 가지의 계명만 평생 행했다. 하루는 24시간인데, 2 가지의 계명만 행하는 데 24시간이 모두 소요되어 버렸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은 오직 2 가지의 계명만 행했는데, '하지 마라'는 8 가지의 계명까지도 이미 지켜 행한 결과를 얻게 된다. 그러자 그에겐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 '너는 10 가지의 계명을 모두 지켜 행했구나'는 평가를 얻게 된다.




나 자신의 영달이 아닌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대상만을 집중해서 나의 모든 율법적 행위를 이루었더니, 나는 모든 계명을 온전히 지켜 행한 자가 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들려주고 싶은 그 말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나눈다'는 것으로 귀결되겠지만, 사실은 그것에만 집중하면 그릇될 수 있다.


일만 달란트의 비유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전해주려 한다.


" 너가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능력은 예슈에게서 이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이에게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목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18:33)


마땅히 해야 할 부분이다. 상식 가운데 최고의 상식이다. 지혜의 근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김'이 먼저 있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그러면 당연히 또는 자연스럽게 나타나


는 행동이 있다. 손에 얼음이 떨어지면 '앗 차가워'라는 말이 나오고, 손에 불똥이 떨어지면 '앗 뜨거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마땅히 '용서하는 마음과 행동'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내 동료(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 역시 용서를 받은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신의 이웃(동료)의 허물을 덮지 못하는 이는 자신의 허물을 덮는 예복(labash), 곧 예슈아의 보혈로 덮혔다고 믿는 그 믿음이 결국은 속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는 속담이 있고, '두루미와 여우'의 이야기를 담은 이솝우화도 있다.




| 장차 내가 받을 사랑의 크기는

'이 땅에서 내가 이웃에게 베푼 사랑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입을 예복도 그러하다.


예슈아를 영접하게 된 그 시점에서 우리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다. 이 사실을 굳건하게 신뢰한다면, 기꺼이 이웃의 허물조차도 우리는 당당하게 탕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 실제 삶에서 베푸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예슈아를 영접하는 시점에서 받은 예복이 마지막 때까지 입혀지거나 혹은 벗겨지게 될 것이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2:20, 26)


천국 잔치에 합당한 예복은 기도의 삶을 통해, 각종 예배를 참석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 것으로 입는 게 절대 아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을 지켜 행하기 위해 우리가 애써서 행했던 율법적 행위로 말미암아, 예슈아께서 인정하시는 바 '덮어주는 주님의 보혈'이 그 예복인 것이다.


십자가의 보혈, 곧 예슈아의 이름이 아니고는 구원에 합당한 어떤 이름도 주시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매우 간단하고 식상할 정도로 모두가 잘 아는 내용이지만, 실상은 천국 잔치에 참여할 모든 이들의 허물을 덮어주는 예복이라는 점을 잊지 않길 바란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예복은 내 의지에 따라 내가 원한다고 해서 입을 수 있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내가 소망하는 스타일과 색상을 따로 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잔치에 허용될 수 있는 스타일과 색상 등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예복이라는 사실.


그러나 그 예복은 예슈아께서 입혀주시는 것이니, 우리가 고민할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그 예복을 입혀 주실 예슈아께서 명령한 대로만 하면 예복은 입혀주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마땅히 명령하신 바, '서로 사랑하라'는 그 계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바라자.





주의)


이웃에게 좋은 대접을 한다고 해서 그게 모두 이웃을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게 사랑입니다. 배부른 자에게 밥을 제공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부자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저 푼돈으로만 여겨지면서 비웃음만 사게 됩니다. 성령님만이 그의 필요를 정확히 보시는 분이시니, 사랑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자, 그런 사람만이 베풀 수 있습니다.그래서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을 우리는 무엇보다 분별해야 합니다.


이를 보면 죄를 지은 이들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야훼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요 labash입니다.

그 사랑의 크기가 일만 달란트요. 저와 여러분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그런 자일 때, 내게 빚진 내 이웃의 빚을 탕감해 주는 내 사랑의 크기 또한 일만 달란트에 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베풀 수 있는 그 모든 사랑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이미 받은 그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탕감받은 경험이 없는 자가 어떻게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습득했던 지식에 따라 용서가 가능할까요? 절대 그럴 순 없습니다. 만일 그런데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훗날 시간이 지나면 그는 당신에게 계산서 하나를 제시할 것입니다. 자신이 지난 날에 용서해 주었던 그 일에 대한 계산서를요.



먼저 야훼 하나님의 labash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입혀진 labash가 벗겨지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십시오. 일만 달란트의 비유에서 자신의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자가 바로 labash가 벗겨진 자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labash를 덧입은 자이지만, 우리의 행함에 따라 영원히 입을 수 있거나 혹은 벗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찢어질 듯 괴롭고 힘드시겠지만, 내가 입고 있는 labash를 기억하시고서 내 이웃의 실족함을 용서할 수 있는 그런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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