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뿌리는 비유에서 드는 의문
씨 뿌리는 비유는 흔히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익히 잘 아는 성경 내용이다. 그래서 특별하게 부연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혹은 설교를 추가적으로 듣지 않는다 할지라도 대부분 서운한 마음을 갖지 않을 내용이다. 이미 충분히 아는 내용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씨뿌리는 비유막4:1~20에 대한 설교를 듣던 중 한 가지 의문스런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고민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 씨를 뿌렸는데,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막4:3~8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중학교 과정까지 시골에서 자랐다. 농사일을 본업으로 삼지 않았던 아버지였지만, 그대로 조금의 밭을 일구신 적은 있었다. 농사일을 거두는 상황에서 씨앗을 뿌려야 할 상황이 있다. 그때 손에 잡히는 대로 씨앗을 사방에 마구 뿌려대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까?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경험담을 들려줄 순 없지만, 작대기로 흠씬 두둘겨 맞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속 씨를 뿌리는 자는 신중한 태도로 씨앗을 뿌리지 않았나 보다. 씨를 뿌리는 자는 씨가 잘 자랄 수 있는 곳에 조심스럽게 뿌린다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길가와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 사이에 씨가 뿌려진다는 그 자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나 시골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계시는 나이드신 분들의 경우라면, 이같은 일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아니 되는 일이란 뜻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 씨를 뿌렸더니 4 종류의 땅에 뿌려졌다고.
|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에 합당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씨 뿌리는 자가 바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바보가 아니라면 분명히 의도된 행동이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럼 의도된 행동이라고 가정해 보자면, 씨 뿌리는 자가 얼만큼 신중한 계획을 세웠을지에 대해 나름 그 수준을 짐작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만일 씨를 뿌리는 자가 전지전능하신 야훼 하나님이시라면 어떨까? 혹 그 가정에 동의가 된다면, 야훼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계획이 얼마나 신중하고 치밀할 것인지에 대해 비교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분이 씨앗을 뿌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농부는 충분히 고민된 이후에 신중하게 내려진 결단 속에서 씨앗을 뿌려졌을 것이다. 길가에, 돌밭에, 그리고 가시떨기 사이에. 마지막으로 옥토밭에.
| 어떤 실험자의 이야기를 잠깐 해 보기로 하자.
한 실험자는 4종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실시하기로 계획했다. 한쪽 다리가 없는 자, 선천적으로 폐가 약하여 제대로 뛸 수 없는 자, 게을러서 운동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 자, 그리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건강한 자 처럼 그렇게 4부류의 사람들을 뽑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개발한 '운동기구'를 3달간 사용해 달라는 부탁을 한 후, 그 결과를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한쪽 다리가 없는 자 그리고 폐가 선천적으로 약한 이에게서는 어떤 향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게으른 자에게서는 약간의 효과가 입증되긴 했지만 그의 게으름 탓에 효과가 운동기구를 꾸준하게 이용하지 않아서 그 효과는 매우 미약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평소 운동을 꾸준히 할 줄 아는 건강한 이의 경우는 한 눈에 보더라도 놀랄 정도의 변화가 나타났다. 그러자 그 실험자는 어떤 결론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실험에 참여한 대상자들에겐 관심이 전혀 없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이 개발한 운동기구와 그의 효능에만 집중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한층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게 될 것이다.
"건강한 여러분. 더욱 강력한 건강을 원하신다면, 제가 개발한 이 제품을 사용해 보세요."
자~ 이제는 본론으로 되돌아 가 보자.
야훼 하나님께서 4군데를 상대로 씨앗을 뿌리겠다고 계획하셨고, 그 계획에 따라 씨앗을 뿌렸다고 가정해 보자.
옥토밭이 아닌 나머지 4군데는 씨앗을 뿌리지 않더라도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하지 않겠는가? 어느 누구라도 손쉽게 전망할 수 있는 나쁜 결과가 얻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소위 전지전능하시다는 분이 그런 곳을 선정해서 아까운 씨앗을 뿌려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대부분의 설교들은 (씨앗이 뿌려지는) '4군데의 땅'에 집중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오늘 내가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이해를 하고자 한다. 즉 어느 누구도 파헤치지 못한 신비로운 비밀을 엿보길 원한다는 뜻이다.
앞선 예에서 보았던 것처럼, 임상실험을 실시하려는 기관에서 임상실험에 참여하길 원하는 다양한 모집단을 모집한다. 그리고 실험이 끝나면 참가했던 모든 모집단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되돌려 보내 버린다. 그리고 임상실험을 통해 얻어진 '제품의 효능'에만 관심을 갖는다.
| 농부이신 야훼 하나님은 '뿌려질 씨앗'에 대한 효능을 검증하길 원하셨으리라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한 이가 있다. 그가 자신의 개발품을 들고 나와서
"이 제품은 매우 신뢰할 만하며 여러분의 생활에 절대적으로 유용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제품에 대한 평가를 개발자가 했다면 우리는 그 평가를 어떻게 여겨야 할까?
"개발자가 자신의 제품을 평가했으니, 어느 누구보다 더 확실한 거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게 옳을까? 아니면
"자기가 자기 제품을 좋다고 말하지, 어느 누가 자기 제품을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개발자가 자신의 제품을 평가하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네"
라고 말하는 게 옳을까?
그렇다. 개발자가 자신의 제품을 스스로 평가한 모든 말은 어떠한 신뢰도 가질 수 없다. 개발자의 제품에 대한 신뢰도 평가는 그래서 사용자 또는 제 3자가 해야 만이 옳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안다.
"제게 돈을 빌려주세요. 이 보증서는 제가 작성한 것입니다. 이 보증서의 내용을 믿으시죠?"
라고 말할 경우, 어느 누구도 돈을 빌리려는 자가 스스로 작성한 보증서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증인'을 세우라고 말한다. 제 3자를 대상으로 돈을 빌리려는 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시킨다. 이것이 이치요 만물의 섭리이며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원리다.
야훼 하나님의 경우 자신의 말씀이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말할 경우, 그 말은 참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요8:13
의 말씀처럼, 자기가 자기 자신을 증언하는 것은 어떤 내용이라 할지라도 참될 수 없다는 것이 율법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말했다고 해서 이 자체가 틀린 말이라고 생각지 않기를 바란다. 예슈아께서도 이 말이 그릇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이 사실을 기초로 자신의 설명을 덧붙이셨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요8:16
이 말씀의 의미는 그 다음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요8:18
이 부분에서 보자면, 앞뒤 순서가 바뀌었다.
예슈아는 자신이 스스로 참되다고 증명할 수 없다. 예슈아는 증명되어야 할 존재이지, 증명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절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 조차도 모두가 인정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먼저 거론하신다. '아버지가 나를 참되다고 인정했다'는 사실이 먼저요. 그러한 명제가 먼저 성립되고 나자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내가 나 자신을 참되다고 인정한다'는 그 사실 역시 참된 명제가 된다.
따라서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나, 이렇게 두 사람이 나 자신을 참되다고 증명하게 되니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바리새인들은 알게 된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요8:17
이처럼 야훼 하나님 역시 자신이 뿌린 그 씨앗에 대해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은 율법에 직접 남기셨다. 그래서 임상 실험자를 통해 씨앗의 효능은 입증되어야 했다.
길가, 돌밭, 가시털기 밭, 그리고 옥토밭이라는 그 사실이 중요하기 보다는, 뿌려졌던 그 씨앗이 죽은 씨앗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씨_뿌리는_비유_속에_감춰진_또다른_비밀'이다.
| 야훼 하나님은 옥토와 같은 심령을 가진 자를 찾으신다.
그래서 길가, 돌밭, 가시털기 밭과 같은 심령을 가진 자를 찾아가서 그들의 심령을 강제로 바꾸시지 않으신다. 다만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면, 그래서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면 그들의 삶에 개입을 시작하실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들의 강팍했던 메마른 땅을 쟁기날로 후벼 파헤치는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들의 심령을 옥토로 만들어 '야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씨앗'이라는 그 사실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길 원하시기 때문에 시작된 야훼 하나님의 개입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개입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된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막4:20
말씀word을 주시는 이의 그 말씀voice, 목소리을 듣는 것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 말씀에 기꺼이 복종할 수 있는 '순종하는 자의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말씀을 영접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마음이 준비되면 그후 실제로 주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준행하는 삶(shamar; שָׁמַר)이 진행될 것이다.
준행하는 삶 속에서 맺히는 열매는 야훼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최상급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의 말씀들을 '우리 입장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는 경향이 짙다는 거 아십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들려주는 교훈과 훈계는 자녀 입장에서 이해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모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게 옳다는 의미에서 주는 것일까요? 모든 것은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길 원하신다면, 그것은 성경 말씀을 주시는 이의 입장에서 이해되고 해석되는 게 합당한 것이지 않겠는지요?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씨 뿌리는 자의 입장에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아비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런 시각적 변화가 여러분과 제게 함께 일어나게 되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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