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게 들려주는 이솝우화] 여우를 이기지 못한 사자와 곰
| 이솝의 우화 가운데 '엉엉, 억울해'라는 이야기다.
곰과 사자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새끼 토끼 한 마리를 두고 서로 먼저 보았다면서 자기 껏이라 우기느라 싸우는 터였다. 싸움의 승패는 나지 않는 채 둘은 얼마를 싸웠을까? 서로 숨을 몰아쉬면서 버겁게 싸우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여우가 슬그머니 다가와 새끼 토끼를 물고 도망쳐 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자와 곰은 여우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새끼 토끼 한 마리를 두고 서로간에 얼마나 힘겹게 싸웠던지, 단 번에 쫓아가서 요절을 내 버릴 것만 같았던 여우였지만 그를 쫓아갈 기력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이다. 사자와 곰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엉엉 울뿐이었다.
| 이솝의 우화는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을 빌어 우리들의 실생활을 비판하였다.
그렇기에 이솝의 우화는 사실 어린 아이들에게 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혜가 부족한 어른들을 향해 따끔한 경고를 주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오늘의 글 '엉엉, 억울해'의 내용을 보면, 사자와 곰은 숲속의 제왕이다. 어느 누가 그들의 먹이감을 빼앗을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자와 곰이 함께 있는 상황이라면, 그들 사이에 놓인 먹이감을 향해 눈독을 들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남기 어려운 지경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솝의 우화는 그토록 턱없는 상황이 너무나 황당할 정도로 탈탈 털려버리는 상황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린다.
사자와 곰이 함께 힘을 합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들의 것을 훔칠 수 없다. 설령 사자와 곰이 따로 있는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사자와 곰은 힘을 합하지 않더라도 가장 강한 존재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사자와 곰 앞에 한끼 식사꺼리도 되지 않는 보잘것 없는 먹이감이 놓인다. 새끼 토끼가 얼마나 대단한 음식이겠는가? 사자와 곰의 덩치를 보라. 솔직히 사자와 곰의 입장에서 누가 먹던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더라도 상관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오늘의 상황은 좀 다르다.
| 어쩌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꾸민 상황일 수도 있다.
둘 중 한쪽에서 포기하고 가면 될 것을, 어느 한 쪽도 포기하지 못하게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이솝의 우화는 그런 상황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하고 있다. 사자와 곰이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둘 간에 죽자살자 싸워야 되는 상황으로 묘하게 이끌려 간 느낌이 든다. 즉, 누군가가 사자와 곰에게 귓속말로 싸움을 부추긴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보잘것 없는 먹이지만, 그 먹이를 포기한다는 그 자체는 자존심이 상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누군가가 속삭였을 거라는 의미다.
그 속삭임은 불필요한 싸움을 가능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곰(또는 사자)을 피하면 안 되지. 내가 누군데!"
라며 그 자리를 비켜 주려고 하다가 이내 서로 매서운 눈초리로 상대를 쏘아보게 되 버렸다. 숲속의 제왕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의도된 싸움을 벌이게 되면 싸움에 참여한 당사자들은 씁쓸한 결과만을 얻게 되고, 그 싸움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음흉한 그만이 달콤한 결과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제왕급 수준의 두 동물이 치열하게 싸울 경우 얼마나 대단한 힘들이 쏟아져 나오겠는가? 하지만 그 싸움이 오래 가면 갈 수록 스스로가 가졌던 힘들은 거의 소진되어 버리고 만다. 그런 상황이 되면 숲속의 어느 누구라도 제왕급에 속하는 사자와 곰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겉 모습에서는 최고의 강함이 비춰 보이지만, 강한 힘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저 허수아비 신세밖에 되지 않는 이를 어느 누가 두려워 하겠는가?
이를 두고 손자병법에는 다음과 같은 병법이 소개되고 있다.
옹개, 고정, 주포 등이 서로 동맹을 맺고 촉군에 반기를 든 일이 있었다. 고정은 자신의 장수 악환을 선봉에 내세워 촉군과 싸우던 중 선봉장 악환이 그만 제갈량에게 생포되고 만다. 그러나 제갈량은 악환의 결박을 풀어주면서 술과 음식으로 후히 대접을 베풀고서 '고정은 충의지사다'는 말로 극찬을 하며 악환을 풀어주었다. 돌아간 악환은 제갈량이 포로였던 자신을 후대했던 것과 고정을 충의지사라고 극찬했다는 사실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며 고정에게 설명하니, 고정 역시 감격해 했다. 하지만 옹개는 제갈량의 반간계라고 경고 했고 주의하라 일렀지만 고정은 옹개의 말을 반신반의 할 뿐이었다.
또다시 치뤄진 전투에서 제갈량은 고정의 병사를 포로로 잡은 후 '너는 옹개의 병사더냐'고 꾸짖고 '옹개가 주포와 고정의 목을 가져오기로 해놓고 어찌하여 약조를 지키지 않느냐'며 호통을 쳤다. 풀려난 병사는 이 모든 사실을 고정에게 전하게 되었고 불같이 화를 낸 고정은 곧장 옹개를 쳐부수어 옹개의 목을 제갈량에게 갖다 바쳤다. 하지만 '고정이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꿔 어떻게 자신의 친한 친구의 목을 벨 수 있겠느냐'며 제갈량이 의문을 제기하자, 이번에는 주포의 목마저 갖다 바치고 만다.
고정에 의해 옹개와 주포의 목이 날아가니 촉은 손쉽게 고정의 세력을 제압할 수 있게 되는데, 후에 제갈량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계책에 의한 결과라고 말하자 고정과 악환은 다시는 반역하지 않겠노라고 울면서 맹세했다. 고정이 옹개와 같이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자였더라면, 이와 같은 제갈량의 친이리지(親而離之; 또는 이간계) 계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둔한 고정은 자신을 칭송하는 자의 말을 철떡같이 믿은 나머지, 신뢰해야 할 관계를 의심하게 되어 결국 스스로 자멸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친분이 두터운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할 상황에서는
'친한 사이라면 이간질시킨다'는 친이리지(親而離之)의 계책이 그 어떤 계책보다 탁월하여 이를 상책이라 말한다. 본시 사이가 좋지 않는 집단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계책이기에 그때는 하책에 속하지만, 평소 친분이 두터운 집단이라면 그때는 그 둘을 이간질시키는 게 가장 좋은 상책이 된다.
왜 그럴까?
사자와 곰의 강한 힘이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모두 소진되어 버린 것처럼, 친분이 깨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군사력을 소진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우둔한 고정에 의해 옹개와 주포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된 것처럼.
| 이것을 수학이라는 개념에서 보자면,
'나눗셈의 묘미를 활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이 서로 모이면 선생님이나 부모의 훈계가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간에 장난끼를 부추기는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보다 더욱 심한 장난끼를 발동하게 된다. 그럴 경우 어떤 방법을 사용하면 좋을까? 둘을 떼어 놓아야 한다. 서로간에 싸움을 붙일 필요는 없겠지만, 일단 어린 아이들을 최소의 단위로 나눠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나 부모의 훈계가 효과를 거두게 되는 수준이 얼마쯤인지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이처럼 강한 집단을 상대로 큰 힘을 쓸 수 없는 혹은 큰 힘을 굳이 사용하지 않고서 상대를 제압하려 할 때, 가장 효과가 좋은 상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계략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지혜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집단이다. 반면 이러한 계략에 의해 스스로 좌초되는 집단이 있다면 그들은 우둔한 이를 친구로 두고 있는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 우둔함은 비단 공부를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자와 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한끼 먹거리로도 부족한 새끼 토끼에 자신들의 자존심을 걸었다는 부분을 지적할 수 있다. 대단한 일도 아니다. 사자가 곰의 새끼를 혹은 곰이 사자의 새끼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로 물러 설 수 없다. 그때는 죽음을 불사하고 싸워야 함이 옳다. 하지만 한끼 입가심 꺼리도 안 되는 것을 서로 차지하겠다는 부분은 매우 옹졸한 모습이라고 밖에 여기지지 않는 상황이다. 그냥 "그래, 내가 졌어. 너가 이겼네. 나는 그냥 갈께"라고 해도 상관없는 일상의 모습이다. 그런데 쓸데 없는 상황에서 자존심을 세워버렸다. 그게 우둔한 자의 모습이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기회를 찾는 자'다. 누군가가 실수를 한다거나 누군가가 중요한 것을 간과해 버리는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중요한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을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겠다고 소리높여 말하면 그건 소음밖에 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귀를 막아 버린다. 그럼 그들의 고함치는 메시지를 어느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오늘날 교회(공동체) 안에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 교회는 정당정치에 관여하는 게 아니라고 본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정당정치는 진리를 탐구하는 집단이 아니고 순전히 이익만을 위해 활동하는 집단이기에, 그들 사이에는 '오늘의 적이 내일은 친구가 된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사용한다. 이익을 위한다면 자신들의 본심 내지는 신념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와는 본질상 함께 할 수 없다. 예슈아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다만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그렇게 양육된 제자들을 통해 세상의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등을 바꾸어 나가셨다.
|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양육된 성도를 통해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을까? 아니다.
교회 사역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모들은 종교적 겉치레에 신경쓰느라 정신없고, 그런 부모를 바라보는 자녀들은 부모의 이중적인 신앙생활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다가 어느 정도 성장했다 싶으면 스스로 교회의 문턱을 넘어 저 멀리 떠나 버린다. 그 결과 교회 전반적으로 평균 연령대가 매우 높아졌다. 어린 세대 혹은 다음 세대가 없어졌다.
다음 세대를 짊어지고 갈 일꾼이 상실된 상황에서 나이드신 성도분들만이 동성애와 싸우고 있고, 정치적 진영 논리에 관심을 두고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자녀 세대는 그런 자신들의 부모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히려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부모가 지지하는 정치진영과 반대되는 진영을 고집스럽게 지지해 버린다. 부모가 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그 반대로만 하겠다는 게 그들의 진심어린 행동이 되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실제 부모 세대가 싸움을 하는데 그 상대는 반대진영의 정치인이 아니다. 그들을 지지하는 자신들의 자녀 세대가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군인 셈이다. 지지자들이 있는데 어느 정치인이 힘을 잃을 수 있겠으며, 그들의 발언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지지층을 이루고 있는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 앉을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교회가 정치 진영과 맞붙어 싸움만 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교회는 부모와 자녀 세대간에 겨냥된 이간질의 계략에 빠져버린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정치진영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하기 보다는, 자녀 세대에게 올바른 사상을 전수하는데 전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올바른 사상으로 성장한 다음 세대는 올바른 정치 진영을 택하여 그들에게 지지를 보낼 것이고, 그렇게 선출된 올바른 정치 진영은 이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 갈 것이다. 교회가 모든 일을 직접하려 한 그 부분이 매우 잘못된 부분이라 지적할 수 있겠다.
교회는 본질을 생각해야 할 때다. 교회의 본질을 망각해 버렸다면 다시금 본질을 기억하고 본질을 추구하는 사역으로 되돌아 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목회자와 사역자 분들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리더들은 회개해야 하리라 본다. 그리고 다음 세대요 미래를 짊어지고 갈 그들을 올바르게 양육하는 부분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부모는 그간의 표리부동했던 삶의 모습을 철저하게 버리고, 이제는 언행일치하는 자의 모습으로 자녀 앞에 서야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각 가정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가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는 부분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그간 (자녀 앞에서) 부끄럽게 살았던 부분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삶을 고쳐나가면 되리라 본다. 그때 이 세상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야훼 하나님의 군대에 의해 다스림을 받게 되리라고 선포한다.
이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그런 부모 세대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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