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두 증인을 요구하는 이유. 예언과 성취는 그 두 증인이라.




주몽의 아들 유리가 왕이 되어 유리명왕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유리명왕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 도절이 죽고 둘째 아들 해명만이 있을 때였다.


당시 주변 국이었던 황룡국 왕이 고구려의 유리명왕에게 활을 보낸 일이 있었다. 이에 해명태자는 활을 부셔 버리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하여 황룡국 왕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유리명왕은 해명태자의 경거망동한 행동이 자칫 주변 국과의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겠다 여기고서 황룡국 왕에게 해명태자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황룡국 왕이 해명태자를 죽이라는 서한을 보낸다. 하지만 황룡국의 왕 역시 전쟁이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두려워 했었고, 해명태자를 직접 만나면서 아까운 인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를 극진히 대접한 후 고구려로 되돌려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명왕은 해명태자에게 자결하라는 다소 황당한 어명을 내린다. 자신의 어리석은 힘만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샀다는 이유를 제시하면서. 해명태자는 자신의 아버지 유리명왕에게 다음과 같은 변론을 한다.


"황룡국의 활을 부러뜨린 것은, 황룡국이 고구려를 무시한 것에 분노하여  행한 것이지, 불효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왕이신 유리명왕께서, 뜻밖에 화를 내시며, 자살을 하라 하시니,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해명태자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유리명왕의 분은 사그러 들지 않고 계속해서 자결을 명하자, 해명태자는 21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신의 창에 몸을 던져 자결을 하게 된다.


|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명태자가 화살을 부러뜨리기 전에 먼저 충분한 설명을 했다면 어땠을까?

즉 충분한 이유를 설명한 후에 분을 표출하면서 황룡국 왕의 화살을 부러뜨렸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유리명왕은 해명태자에게 자결을 명했을까?


충분한 설명이 먼저 요구되고, 이를 통해 유리명왕이 납득할 수 있었더라면 화살을 부러뜨리는 해명태자의 행동은 '선한 것 또는 올바른 행동'이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명왕을 설득할 수 있었던) 설명이 없는 상황에서 불현듯 화살부터 부러뜨리는 행동을 해 버렸다. 그러자 해명태자의 행동은 '충분히 악한 행동 또는 전쟁을 야기할 수 있는 우둔한 행동'으로 평가되었다.


충분한 설명이 있었느냐 혹은 없었느냐의 차이가 이토록 판이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먼저 납득 가능한 설명이 있고 그 다음에 행동이 이어진다면 그의 의도는 참된 것으로 평가받게 된다. 하지만 설명이 없는 상황에서 행동만이 있을 경우, 그의 의도는 악한 것으로 평가받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 또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선하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반드시 2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충분한 설명이 먼저 서술되고 그 이후에 (설명을 현현시키는) 행동이 뒤따라야만 한다.




이러한 이치는 성경의 본질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왜 우리는 먼저 예언을 듣고, 그 예언된 말씀의 성취를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겠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누군가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납득시키기 위해 '예언'이라는 형식을 빌어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했다. 그리고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그 예언의 내용이 이제는 우리 앞에서 현상으로 성취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예언을 주시고 그 예언을 성취하신 그 분의 의도는 참되다는 것을 우리에게 입증하실 수 있다.


이제 나는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되 그의 포도원에 관해 내가 사랑하는 자에 대한 노래를 부르리라.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는데 열매를 풍성히 내는 작은 산에 있도다. 그가 거기에 울타리를 두르고 그것의 돌을 주워 내고 최상품의 포도나무를 거기에 심고 그것의 한가운데에 망대를 세우고 또 그 안에 포도즙 틀을 만들었도다. 포도원이 포도 내기를 그가 바랐는데 그것이 들포도를 내었도다.

(사5:1~2.흠정역)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포도원이 있었고 그곳에 어울릴 법한 최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잔뜩 부푼 기대감에 최상품의 포도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도열매와 맛깔스러운 포도주를 상상하면서.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충격이다. 최상품의 포도열매가 맺혀야 할터인데, 들포도 열매가 맺힌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포도원을 그토록 사랑한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는데, 그래도 모두들 내 감정이 진짜인지 궁금해 있는터인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포도원에서 들포도 열매가 맺혔다.


오 예루살렘 거주민들아, 유다 사람들아, 청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해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었으랴? 그 안에서 내가 행하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포도원이 포도 내기를 내가 바랐거늘 그것이 들포도를 냄은 어찌된 일이냐?

(사5:3~4.흠정역)


너무 큰 기대가 한순간에 사라지자, 애절했던 간절함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자,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행할는지 너희에게 말하리라. 내가 그것의 울타리를 제거하여 그것이 먹히게 하며 그것의 담을 헐어서 그것이 짓밟히게 하리라. 또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리니 거기서 가지를 치거나 땅을 갈지 못하고 다만 거기서 찔레와 가시가 올라오리라. 내가 구름들에게 명령하여 그것들이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사5:5~6.흠정역)


물론 이 이야기는 비유다. 


만군의 {주}의 포도원은 이스라엘의 집이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초목은 유다 사람들이니라. 

(사5:7a.흠정역)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초림의 예슈아께서 어떤 일을 행하게 되실 지, 그 사역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갔으며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리고 그들의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르도다.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은즉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큰 무리와 그들의 영화와 또 ​기뻐하는 자가 거기로 내려가리로다.

(사5:13-14.흠정역)

13절부터 이어져 오는 내용을 보면, 야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뻐하는 자'가 지옥에 내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 기뻐하는 이는 유다 사람인데, 그분께서 기뻐하는 그가 지옥으로 내려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신학적으로든 일반적인 신앙의 수준에서든 매우 민감한 내용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슈아라는 분이 지옥에 내려갔다는 사실이 전혀 납득될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신경 원문이라 말할 수 있는 영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 자료 원문 보기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해당 문구는 말 그대로 '예슈아는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으로 보내졌다가 다시 오셨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사실에 혼란을 느낀 미국의 감독 교회는 1789년에 제정한 사도신경의 내용에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을 아예 삭제하거나 다른 표현을 쓰게 했다가 1892년에는 이를 철회하는 등 갈팡질팡 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사도신경은 성경 속 내용의 일부가 아니다. 신앙과 성경에 조예가 깊은 어떤 신학자 분들이 만든 기도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계1:18.새번역)

※ 개역개정에서는 '음부의 열쇠'로 표현됨


이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슈아의 지옥 강하(地獄 降下)에 관한 내용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신학적인 부분에서. 이러한 논쟁에 언론매체 역시 동참하고 있다. 성경적 근거 없는 내용으로서 '음부에 내려가시고'라는 내용을 특정 목회자가 이야기 했다는 비방의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포도원을 지극히 사랑하는 분은 자신이 기뻐하는 이를 기꺼이 지옥에 내려가게 하시어, 그 포도원에 심은 포도나무가 최상품의 포도나무였다는 사실과 함께 최상품의 포도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하실 것이다. 그 결과 포도원에 대해 언급하셨던 그분의 모든 이야기는 최상품의 포도열매를 손에 쥐는 것으로 참되다는 것이 만천하에 입증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대목은 개인의 뇌피셜이라 할 수도 있겠기에, 신학적 논쟁거리로는 걸맞지 않는다 할 수 있겠다.


성경은 이렇듯 어떤 하나의 내용이 참되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선 반드시 둘 이상의 증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요8:17.개역개정)


왜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지 그 사실에 대해 나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들 역시 누군가에게 충분한 설명을 먼저 제시하고, 그 이후에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성경적 삶을 살아가는 올바른 신앙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세상도 모두 다 아는 이치로서

언행일치

Walk the talk

이기 때문입니다.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간다면, 어느 누가 우리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의 심리………를 정확히 지적한 댓글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키질과 휴거는 예루살렘 성전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던 의외의 장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