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의 낯선 자. 그는 이방인이라. 그런 그에게 감춰진 비밀이 있는데...



|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 유대인과 이방인 -


이 둘을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택함받은 자 '(choose; bara ברא)와 '택함받지 못한 자'다.



'택함'이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것은 그 땅의 (실제 주인이 오기 전까지는 주인의 권리와 책무를 대신 이행하는) 대리인 자격으로 내정되기 위함이다.


한편 #이방인 은 누구일까?

우리는 그를 낯선 자라 부른다.
  • Stranger, or étrangère.


그들은 자신이 딛고 서 있는 그 땅에 대해 어떠한 권리와 의무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런 중에 성경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1

택함받은 자에게 첫 번째로 주신 책무는 다름아닌 '정처없는 유목생활'이다. 그렇기에 유대인의 전반적인 사실들은 유목민이라는 설정 안에서 보다 온전하게 설명된다. 즉 그 땅의 실질적인 권리와 의무를 소유한 자이면서 언뜻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는 '마치 그 땅의 소유권을 갖지 못한 자'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물을 빼앗긴 이삭처럼) 땅의 주인이면서도 주인으로 간주되지 못한다. 얼마나 억울한가?


이에 대해 야훼는 약속을 주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

누구에게? 그 땅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방인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주인을 정중하게 대함으로써 실제 주인이 오는 그 날에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갈3:8

택함 받지 못했다는 컴플렉스 때문일까? 택함받지 못한 자들을 향한 야훼 하나님의 이같은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더욱 강퍅해져만 갔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1:11

본시 택함받지 못했다는 컴플렉스로 인하여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 그 땅에서 살 수 있는 권리마저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쉴 곳'shabbat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그런 이들이 될 것이다.

그들에겐 그 땅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택함받지 못했다는 컴플렉스가 있었지만,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 거라며 자신을 택하지 않은 야훼 하나님에 대해 용서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택함받지 못했다는 지난 날의 사실에 연연하지 않고 대신 자신들을 향해 준비하신 그 축복의 약속(창12:3)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 약속은 신실한 이의 것이니, 그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 약속이 성취될 수 있도록 철저히 지켜 나가며 살게 된다. 늘 소망을 꿈꾸면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3:9

결국 그들에겐 택함받지 못했다는 지난 날의 상처가 회복되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택함받지 못한 그들이 택함받은 자의 권세를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권세는 어떠한 권세인가?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그 땅의 소유가 인정되면서, 그 땅에서 영원한 쉼이 보장된다shabbat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낯선 자로, 외지인으로서 살아갈 필요가 없어졌지 않는가?



땅의 주인은 이렇게 택함받지 못한 자에게 주인의 대리인 자격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자격을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땅의 주인은 그 땅을 무척이나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3:16a

그렇기에 그 땅을 자신의 마음처럼 아껴줄 수 있는 이를 찾았을 것이다. 이를 위해 많은 후보자들을 시험하고자 하셨으리라. 그들이 진정 자신의 땅을 사랑할 수 있는 자인지 아니면 미워하는 자들인지. 그리고 자신의 땅을 충분히 사랑해 줄 수 있다고 인정받은 이들에 한해서 주인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그에게 이전해 준다. 주인을 대신하여 모든 권리와 의무를 지닌 대리인으로서.


하지만 이것 하나 만은 지켜야 한다.

주인의 땅을 자신의 땅인양 소유하게 된 대리인이지만, 주인의 땅을 사용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큼은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땅 사용료'지대를 지불해야만 한다. 분명히 대리인이 수고하여 번 수익이지만, 땅을 사용하여 벌 수 있었던 만큼 '땅 사용료'는 정당한 주인의 몫이다.



땅의 사용료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무게감이 주어지는데, 믿음의 분량에 맞는 수준에서 '십의 일'이라는 비율이 정해진다. 많이 번 자는 많은 사용료를, 적게 번 자는 적은 사용료를 지불할 수 있도록 땅의 주인은 지대를 설정했다. 얼마나 현명하고 자비로운 모습인가.

혹 어떤 이들은 '대리인 자격과 그 권리'에만 집중한 나머지 '대리인의 책무 또는 의무'를 망각할 수 있다. 이는 주인의 땅을 대신 관리 또는 치리하고 있다는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는 커다란 위협요소가 된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설정된 지대인 만큼, 지대가 올라간다는 사실에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상승하는 지대를 보면서 자신의 믿음의 분량 또한 상승하고 있음을 상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자신의 시야를 상승하는 지대, 곧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면 그는 지대를 지불하려는 마음이 사그러 들겠지만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믿음이 지대와 비례하여 성장한다는 그 사실에 집중하다보면, 지대의 상승을 보면서 자신의 믿음의 수준을 측량할 수 있게 되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런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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