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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1번째 예슈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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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com/ko/users/iqbalnuril-12845379 | 실제 어떤 상황을 나눠 보자. 한 예언 사역을 하시는 이, 곧 예언자가 교회(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분은 교회(공동체) 안의 지체들 각각을 상대로 예언 사역을 하셨다. 사역이 끝나고 그는 그곳을 떠났다. 그곳의 성도들 각각은 자신이 받은 예언의 내용들을 나누면서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한 사건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언자가 해 준 내용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가운데 한 성도는 특이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저는 예언자의 내용 그대로를 믿기 보다는, 예언을 주신 이에게 나아가 '예언자를 통해 제게 주신 그 예언의 상세한 설명'을 들려 달라고 합니다." "가령 '당신은 앞으로 커피를 마시지 마십시오'라는 예언을 들었다면, 제가 왜 커피를 마시면 안 되는지, 그 상황의 배경을 알려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들었던 히스기야 왕이 야훼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고, 그 결과 선지자의 예언 내용과 다른 결과를 이끌어 냈던 것처럼요."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신이 히스기야 왕입니까?" 라는 다소 격양된 듯한 비난이 쏟어졌다. 소위 예언 사역에 대해서 나름 인정을 받는 예언자의 예언인데, 그 예언을 들은 그대로 수긍하고 따라야 함이 옳을 것인데, 그러한 기대와 다르게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간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처럼 긴장감과 짙은 냉기로 가득차 버렸다. pixabay.com/ko/users/Herriest-98056 다른 한 번은  "저는 설교시간에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예로써 성경 일독같은 좋은 권면이 있을 경우, 제 삶에 일독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를 기도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이 이치를 안다면 당신의 자녀는 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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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실패는 용서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프로들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의 시절은 어떨까? 그곳에서도 실수 또는 실패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학생의 시절에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실수를 해야 하는 시기다. 그 이유는? '달걀이 먼저야? 아니면 닭이 먼저야?'라는 질문에 답을 하려 하기 보다는, 닭과 달걀을 시간에 따라 혹은 다른 연관성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을 해 보라. 즉 달걀이 먼저일 상황에서는 달걀을 통해 성숙된 닭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닭이 먼저일 상황에서는 성숙한 닭에 의해 갓 태어난 달걀의 존재가 이해가 되지 않겠는가? 무작정 이루어진 비교와 경쟁 시스템이 우리 자녀를 인간답게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발달시키는 자로 성장하는게 아니라 하겠다. 자녀의 마음이 인정하는 그 분야를 먼저 찾아야 할 것이고, 자녀와 상의하여 전심으로 그 분야에서 노력을 다 할때 그는 부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크고 재능이 넘치는 인간다운 자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오늘의 영상을 통해 더 상세한 이야기를 함께 나눠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산다면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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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서 살아가는 이는 있을 수 없기에, 이 세상에는 독불장군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인간관계가 있는데 이를 경험하기가 무척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바라는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요? 제가 생활하는 중에 오늘까지도 겪고 있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소소한 모습이 하나 있는데요. 오늘 아침에 문득 이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짧게나마 제 삶의 한 조각을 나눠 보려 합니다. 누구를 비방하려는 것도 또는 제 자신을 높이려는 것도 아닌, 단순히 삶의 이치 하나 만을 나누고서 그 가치를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입니다. | 나름 큰 아파트 단지 옆에 제가 다니는 상가 교회가 있습니다. 아파트와 인접해 있으면서, 근처에선 가장 큰 주차장이라 할만큼 다소 규모가 있는 상가건물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이 너무 지저분한거예요. 사실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죠. 그러다 보니 외부 방문 손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던터라, 최근부터는 교회에서 상가 관리를 도맡아 책임지기로 약속했습니다. 상가 주차장을 비롯해서 주변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정리해 주는 일을 하는데, 문제는 아파트의 정원과 상가 주차장이 붙어있다는데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아파트 정원에는 과실수며 다른 다양한 나무들과 꽃들이 피는데, 이것들이 철을 따라 또는 계절에 맞춰서 상가 주차장 쪽으로 낙엽을 뿌려댑니다. 자신들의 의도는 있겠죠. 무미건조한 시멘트 바닥보다는 낙엽진 곳을 밟을 때 들려오는 낙엽의 바스라지는 그 소리는 모두가 즐거워 하잖아요? 그런데 자동차들은 전혀 그 소리에 관심이 없더군요. 그래서 주차장 관리를 맡은 저는 고민했죠. 떨어진 낙엽에 대한 책임은 아파트 관리실에 있으니, '합법적으로 민원을 제기해서 주차장을 깨꿋하게 하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려는 그 즈음에 제 마음 속에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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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안에서 우리는 베풀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가진 자 만이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은혜를 받은 바가 있었다면, 받은 그 만큼을 베풀 수 있다. 이것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그런 삶의 원천으로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나태한 삶은 미워하나 비만한 자는 존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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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는 미워하나 죄인은 미워해선 안 된다 ' 는 말이 있다. 이 사실은 사회 또는 신앙의 다른 영역으로도 확대되어 이해되기에 충분한 만물의 이치를 담고 있다. 올바르지 못하였던 삶을 산 결과, 우리의 몸은 데미지를 입는다. 이렇게 훼손된 몸의 일부분으로 인하여 몸의 중심은 변화되는데. 몸의 중심을 바로 잡기 위해 우리 몸은 밸런스를 잡기 위한 특단의 일을 진행한다. 그것은 바로 중심에서 벗어나는 몸의 부분에 살을 찌우게 하는 것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소를 평형하게 만들기 위해 반대편에 무거운 것을 놓는 것처럼. | 비만은 우리의 비난을 받을만한 대상이 아닌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비난을 받기에 합당한 대상 은  '체질을 고려하지 못한 채 서구화 되어버린 삶의 방식' 이다. 우리의 삶에 잘못 적용된 삶의 방식을 비난하고 조롱할 순 있겠으나, 그런 삶 속에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 곧 비만해져 버린 몸을 가진 이들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삶 가운데 죄의식은 삶의 방식에 적용해야 할 것이며, 죄인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비만해져 버린 이들을 존중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사회의 인식에 이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면, 대립으로 인한 분쟁은 사라지지 않겠느냐며 기대를 해 볼 수 있으리라 본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영상을 꼭 참고해 주세요.

귀중한 일은 누구에게 맡기는게 현명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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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척이나 소중한 분이 있다. 그런 분이 나를 방문하셨다. 이분을 모시는 일을 나는 어떤 직원에게 맡길 수 있을까? 갓 입사한 풋내기 사원에게? 아니면 오랜 기간 동안 내게 신뢰있는 행동을 보인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직원에게? | 상황을 바꿔보자. 이번에는 나와 상관없는 물건을 판매하는 판매원이 나를 방문했다. 이 판매원을 상대하는 일에 나는 어떤 사원을 보낼까? 갓 입사하여 회사일에 제대로 아는게 거의 없는 사원? 아니면 내가 아끼는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사원?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스스로가 더 잘 알것이라 생각하는 만큼, 이 상황을 대처하는 모습은 상식 그 자체다. 소위 잡상인을 상대하는 일은 건물 입구의 경비원 분들이 주로 처리하는 업무인 것이고, 귀한 손님들은 사장 또는 회장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최측근들이 맡아서 하는 주된 업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인에게 있어서 중요성의 우선순위에 따라 맡게 되는 사원들의 수준도 결정된다고 보는게 모두가 아는 상식이다. |  그럼 잠시 교회 공동체라는 신앙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겠다.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에게 어떤 일, 곧 헌신을 부탁 할 때가 많이 있다. 어떤 이에게 헌신을 부탁하는게 좋을지 대충 짐작이 가리라 본다. 찬양 인도자로 헌신을 부탁하려 할 때, 믿음과 신뢰할 수 있는 이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즉 준비된 성도에게 맡기는 것으로서. 새신자 등을 마중하는 헌신에 믿음과 신뢰할 수 있는 이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즉 준비된 성도에게 맡기는 것으로서. 이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는 사역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한 존재를 대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이는 실제 삶에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다. 신앙을 떠나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삶의 이치로서. 내가 얼마 만큼 준비되었는가에 따라 내가 도맡아서 할 수 있는 업무의 수준이 이미 결정되었다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