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18의 게시물 표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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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믿어 주는 당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에디슨이 집에 와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 선생님께서 이 편지를 어머니에게 주기만 하라고 하셨어요 " 라며 에디슨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어머니는 큰 소리로 에디슨에게 편지의 내용을 읽어 주었다. "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 " 우리 학교는 너무 작아서 당신 아들을 교육시킬 만큼 좋은 교사가 없습니다. " " 당신이 직접 아이들 교육시키십시오 " 에드슨의 어머니 낸시는 아들의 친구이자 선생님이 되었다.  아들에게서 "왜?"라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아들과 함께 백과사전을 찾으며 인내로 가르쳤다. " 나는 내가 막힐 때면 언제나 나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 라고 쓴 에디슨의 일기는 그의 어머니 낸시의 인내심을 가름케 한다.  수 없이 많은 실패 속에서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잃지 않고 마침내 발명왕이 될 수 있던 것은 그의 어머니 낸시의 인내 어린 가르침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에디슨의 어머니 낸시는 희망을 말했다. '왕따'요, '학습 부진아'이며 '열등생'이었던 에디슨.그가 세계적인 롤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던 것은 세상 모두가 그를 부정할 지라도,아들을 신뢰하고 믿어주는 어머니의 믿음 ( faith not believe )이 있었기 때문이다. " 나를 믿어 주는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 이것이 지적장애로 학교에서 쫓겨난 에디슨을 천재로 만든 그 이유요 에디슨의 강인한 의지였다. 여러분. 내가 능력이 많아서 훗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세상은 나를 버릴지라도

산상수훈의 본질은 어디에 있을까? 의외의 질문을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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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ve Thru History 산상수훈에 대해 설교자 분들이 설교하기를 "구약에 거론된 계명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율법의 행위적으로 완성도를 꾀할 수 있는 구약의 계명들'에 비해 산상수훈의 기준은 '마음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라는게 정설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예슈아께서는 왜 마음의 중심 부분에 해당하는 심오한 속성들을 언급하셨을까? 겉으로 행하는 부분조차도 제대로 지켜 행하기 힘들건만,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행동을 기본(default)으로 삼으시겠다는게 너무 격한 기준이지 않을까? 사61장.(개역개정)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pixabay 이사야의 편지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가난한 자'가 언급되어 있고, '포로된 자' 그리고 '마음이 상한 자' 등등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 이 중에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를 보면 그들은 외관상 훤히 보이는 이들이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써 실제로 가난한 자에게 아름

마지막 때의 종교통합은 어떤 종교로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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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대로 향하여 가는 길목에서 신세계 정부는 하나의 종교로 통합을 이루려 한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자신의 신격화 단계를 거치면서 종교적인 부분까지 자신의 통치 아래에 둔다. 북한의 독재체제와 그들의 신격화가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세계를 하나의 권력 아래에 두겠다는 포부는 그 자체로 모든 시민들에게 하나의 종교만을 허락하겠다는 의지적 표현과도 같다. 그래서 신세계 정부의 행보가 나날이 빨라지는 것을 묵도하는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 종교"에 의해 종교통합이 이루어질 것인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오늘은 종교통합을 이루는 마지막 종교는 어떤 종교일지에 대해 함께 나눠보길 원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그렇다. 어제의 아침이 오늘의 아침에 다시 찾아오고, 내일의 아침에 반드시 찾아 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사에도 반복되어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는데, 이것을 평행이론이라고 한다. ☞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그 교훈을 배우라 이는 '도플갱어'의 또다른 표현처럼 여겨지는데, 동일한 삶을 가진 사람이 각기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아가는 것이다.  프라임경제 yes24's blog 역사의 반복성은 비단 영화의 소재로만 활용되는 그런 시시콜콜한 속성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여전히 일어난다. 아버지 세대의 모습들이 자녀 세대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부모 세대의 잘못된 선택이 자녀 세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들은 역사의 반복성을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경우다. 이렇듯 우리는 '역사는 반복된다 또는 평행이론'이라는 전문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역사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이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종교통합을 앞서서 '미리보기'할 수 있다는 추론을 하게 되었다. | 종교통합 미리보기 한 국가가

믿음 좋은 배우자와 살고 싶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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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을 자청하는 우리들. 부부의 인연을 신앙 안에서 맺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더욱 튼튼한 신앙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pixabay 우리들은 이런 로망을 꿈꾸며 신앙 안에서의 결혼 생활을 기대한다. 그런데 실제 결혼 생활은 로망이 아니다. 전투다. 우리는 상대 배우자를 바라볼 때,  " 저 사람이 조금만 더 신앙의 성숙을 이룬다면 좋겠다 " 는 생각을 품는다. 아마도 '십중 팔구'(80~90%)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 배우자의 신앙에 좋을 법한 (삶의) 보약들을 찾아 헤맨다. 누군가 '이거 신앙을 성숙시키는데 효과가 있어'라는 말만 하면, 서적이든 집회든 또는 안수기도가 되었든 그 순간부터 그것들은 (삶의) 보약이 된다. 보약을 확신한 그는 기필코 자신의 배우자에게 복용시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다. 만에 하나 배우자가 복용하기를 거부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적으로 복용시키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pixabay 이때부터 가정에는 '종교 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bellum sacrum)이 발발한다. 신앙의 성숙을 이끌어주는 (삶의) 보약을 권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정당하고 정당해야만 한다. 그래서 보약을 권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히 성기사(Knights Templar)로 여긴다. 보약을 거부하는 배우자는 상대적으로 사단의 무리가 된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에는 무척이나 거룩한 모습인데 거룩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가정에서의 모습에서는 거룩은 찾아보기 몹시 힘들다. 패배가 아니면 승리만 남는 그런 처참한 현장 일뿐이다. 배우자의 신앙이 성숙하면, 나 자신에겐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배우자의 신앙 수준이 가히 '의인'(the righteous; righteous person)의 반열에 올랐다. 이 사실이 나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올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만났었던 예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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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는 어디일까? 엠마오(Emmaus; 온천)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32km 지점. 이곳은 성경에서 단 한번 언급되었고 이곳의 위치는 정확하지는 않다. 출처) holybible 지명조차 역사적 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엠마오. 그런데 그런 곳으로 (12제자에 속하지 않는) 두 제자(눅24:33)가 길을 간다. 누가복음 24장(새번역) 12.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13. 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 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분명 베드로 등의 사도들과 더불어 함께 있던 무리들 중의 두 사람이다. 그 중의 한 명은 (어느 마리아의 남편) 글로바요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biblia.co.il 누가복음 24장(새번역) 14.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15.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중략)... 예슈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의문성이 짙지만 부활하셨을 거라는 이야기 등의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시점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다가왔다. 눅24:15 ...(중략)...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다가온 이를 보았다. 그리고 함께 대화도 나누었다. 그런데 그가 누군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눅24:16.새번역) 예슈아께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어떤 대화냐고 묻자, 글로바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