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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를 본 받는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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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com 예슈아께서 행하신 일들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 안의 기록된 내용들을 보면 일반적인 우리네들의 모습과 현저하게 다른 모습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주어진 현실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 모습" 이다. 어떤 악조건의 환경이 있을지라도 예슈아는 불평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환호성을 외치는 경사스러운 상황이 펼쳐질 지라도 예슈아는 그 순간을 즐기지 않으셨다. 자신에게 현재의 상황을 허락하신 "아버지의 뜻"에만 집중하셨다. 그래서 기쁠 때나 슬플 때를 만나면 늘상 감정의 기복을 경험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슈아는 능히 극복하실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상황에 구속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뜻을 바라보는 영적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 걸까요? 왜 우리의 마음 속에 (예슈아께서 주시는) 자유가 없을까요? 왜 우리는 현 상황을 두려워함으로써 낙심하고 좌절하고 싶은 마음을 품을까요? 예슈아의 기록된 모습을 본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안 되는 상황을 억지로 이루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체, 무너지는 마음을 품고 있는 그런 나약한 모습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당당하게 맞아 섰습니다. 그 상황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아시나요?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그 상황은 하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은 내가 품기엔 너무 뜨거운 돌과 같아서, 오히려 나를 태워버릴 수 있기에 허락지 않으십니다. 반면 내 기준에, 내 생각에는 전혀 합당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허락되는 강권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나로써는 피하고 싶은데, 하늘 아버지께서는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내게 강권적으로 허락하십니다. 이는 내가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훈련이기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내

사람이 섭취하기에 알맞은 식품은 병원성 미생물의 생장에도 쉽게 이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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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ck의 미생물학 (12판)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의 일부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내용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 "해당 교재의 일부를 사진으로 담아"서 인용하였다. 아래의 사진은 해당 교재의 8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사람이 섭취하기에 알맞게 만들어진 식품은    병원성 미생물의 생장에도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식품은 적절하게 가공되어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이 전달되지 않도록 관리되어야 한다. 고 언급하고 있다. 이 내용을 토대로 약간의 추론을 더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늘의 나눔을 하고자 한다. 위의 내용에 대해서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보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사람이 먹기 좋은 식품의 상태는 병원성 미생물도 (생장을 위해)먹이감으로 삼기 좋은 상태다. 따라서 병원성 미생물이 (생장을 위한)먹이감으로 삼지 못하도록 적절한 관리로서, 방부제 등을 활용한 식품 관리가 필요하다고 여길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식품을 섭취하는 사람도 (생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흡수하기에 어려운 상태가 될 것이다. 라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 더욱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다. 내가 편하게 길을 걷고자 산에 좋은 길을 내 놓았다. 그런데 그 길은 야생 동물에게도 편하게 걷는 길이 된다. 그래서 그 길을 개선함으로써, 야생 동물은 제대로 걸을 수 없는 그런 척박한 길로 바꿔 버렸다. 그러면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상태가 되었을까? 역시나 척박한 길이 되었지 않았을까? 이러한 생각을 좀더 확장하면 다음과 같은 추론을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게 좋은 맛을 주는 사탕이 있다. 하지만 그 좋은 맛은 곤충이나 벌레들에게도 좋은 맛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화장품이나 세제 그리고 향수 등이 사람에게 좋은 향기를 풍긴다면, 마찬가지로 인체에 유해하거나 무해한 미생물 등에도 좋은 향기로서 다가가게 될 것이다. 사자가 자신의 분비물을 주변에 뿌림으로써

건강한 몸, 아픈 몸을 허락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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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 pixabay 그 둘 간의 차이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매우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 "이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 이지 않을까?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곧장 순종하는 자신의 육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뜻하는데로 모두 행할 수 있다. 반면 아픈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는 몸의 불순종함을 경험하는 자다. 하반신 마비인 사람의 경우, 의지적으로는 걷고 싶으나 몸은 그 의지적 결단에 순종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의 차이. 부인하기 힘든 차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건강한 삶과 아픈 삶을 허락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리라 믿는다. 건강한 삶을 허락받은 이는 복을 받은 자요 아픈 삶을 허락받은 자는 저주 받은 이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좋은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신데. 왜 우리에게 아픈 삶을 허락하셨을까? 아픈 사람에게는 그 갈급함이 더욱 커져가는게 있다. 바로 건강한 사람의 삶을 향한 갈급함이다. 그 갈급함을 느끼게 하시려는 부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 의도하시는 바는 무엇일까? 앞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의지, 곧 자유의지로서 몸을 자유자재로 다스릴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생명이 가득한 상태는 분명 건강한 상태다. 그래서 살펴보면 건강한 몸 상태는 분명 의지에 순종하는 몸과 그의 기능들이 있음을 믿지 않는 이들도 다 인정한다. 우리는 이 사실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유의지로 몸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삶이요 생명력이 강한 자의 삶이다. 그럼 이러한 생각을 좀더 확장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풍요로운 삶이 있는가 하면 몹시

약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강생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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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다. 그러면 대부분은 사람들은 병원이나 약국을 찾아가서 약 또는 건강보조식품을 먹는다. 무엇이든 먹기만 하면 몸이 회복되지 않겠나 싶어서 열심히 먹는다. 하지만 초반에 약간의 효과가 있는듯 하다가 이내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는다. 보약이란 보약을 다 먹어도 차도는 없다. 도리어 몸이 더 나빠지기만 한다. 왜 그럴까?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할 경우, 즉 무지할 경우 우리는 제대로 된 효과를 누릴 수 없다. 마찬가지다. 비록 내 몸이지만, 내 몸에서 일어나는 증상(현상)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우리 몸은 단 2 가지의 증상만을 일으킨다고 보면 매우 간단해지면서 쉬워진다. 사람은 무조건 먹어야만 산다. 먹지 않고 사는 이는 없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먹지 못할 때" 우리의 몸은 허기라는 신호를 일으켜서, 식사를 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한편 먹었으면, 소화되고 난 나머지 음식 찌꺼기를 배출하라는 신호가 오는데, 이것은 "응가 혹은 소변마려움"으로 나타난다. 한마디로 "먹고 배출하기"만 제대로 해도 건강에는 무리가 없다는 뜻이다. "먹고 배출하기"는 매우 쉬워 보인다.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가능한 일이라 여긴다. 그렇기에 "먹고 배출하기만 신경쓰면 건강이 회복됩니다"라고 하는 말에 콧웃음을 치고는 귀담아 듣기를 거부한다. 그런데 사실은 먹지 못하여 "영양소(미네랄) 결핍"이 생기면 죽는다. 반대로 무척 잘 먹는데 배설을 하지 못하면, 이 또한 죽음에 이른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다양할 뿐, 제대로 먹지 못할 때도 그리고 제대로 배설을 하지 못할 때도 죽는다는 사실에서는 동일하다. 음식물 찌꺼기가 대변으로서 정상 배출이 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과도하게 오랜 기간 동안 체내에 잔류하게 되면 몸 안에서 부패된다. 음식이 부패될 경우,

[자녀 교육을 위한] 별과 은하까지의 거리는 어떻게 측정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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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서는 자(scale)라는게 있다. 그래서 거리나 크기, 길이 등을 잴 수 있다. 하지만 그 공간이 더 커진다면? 자를 이용한다 할지라도, 1m의 자를 평생 옮겨 놓아도 그 길이를 다 잴 수 없을 만큼 공간이 넓어진다면? 그 순간에는 1m가 아닌 1km 혹은 1,000km 등의 길이를 갖는 자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크기의 자 조차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방대한 공간이라면? 행성과 행성 사이의 길이는 빛이 하루를 가는 길이로 환산(바꾸어서)하여 계산한다. 빛은 1초에 3 × 100,000,000 m = 300,000 km를 움직인다. 그럼 하루를 계산해 보면 1 day = 24 h× 60(분/h) × 60(초/분) = 86400 초 가 된다. 여기에 30만 km를 곱한다. 그러면 빛이 하루에 이동하는 거리가 나온다. 30만 (km/초) × 86400 (초) = 259.2 × 1억 km 이 길이가 상상이 될까? 우리는 이 길이가 얼마나 긴지 혹은 얼마나 멀고 먼 거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 이는 우리의 생활권에 속한 길이가 아니기 때문 이다. 그런데 행성과 행성간의 거리는 빛이 하루를 가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빛이 일년(1 year)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아 본다. 259.2 × 1억 (km/day) × 360(day) = 93312 × 1억 km ≒ 9조 km 솔직히 1조원이라는 돈 조차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우리네들인데. 거기에 1천 배나 더 큰 9조 km라는 길이는 상상이나 갈까? 이 길이를 대략 "1광년"으로 삼는다. 물론 더 자세한 길이값은 여러분들이 직접 산출해 볼 수 있으리라. (본 글에서의 1광년은 상상의 세계를 훨씬 뛰어 넘는 스케일을 알려주려는 의도에서만 제시된 값이다.) 그럼 여기서 질문이 있을 것이다. 1광년의 길이를 갖는 자(scale)은 어디에 존재할까

자녀를 살리고 싶다면, 다니엘이 했던 것처럼 "왕의 산해진미"를 먹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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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부갓네살) 왕이 자기 내시들의 우두머리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단1:3a. 흠정역) 느부갓네살 왕이 "내시의 우두머리"에게 하는 말이다. 내시는 누구였던가? 그는 남자다. 하지만 남자로서의 역할(기능) 일부가 상실된 자다. 다니엘에 관한 이야기는 "내시"(환관)라는 직업관에서부터 시작된다. 내시로 표현된 히브리어 saris(סריס)는 "eunuch"로 '환관, 내시, 거세당한 남자'란 뜻을 갖는다. ...아스부나스가 이스라엘 자손과 왕의 씨와 통치자들 중에서 몇 사람...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 (단1:3b~4. 흠정역) 내시 우두머리(환관장)는 바빌론의 모든 노예(포로)들 중에서 이스라엘 자손 왕의 씨 통치자 들을 1차 구별한다. 그렇게 구별된 자들 중에서 조건을 더하여 2차 구별을 시도한다. 그 조건으로서 흠이 없고 잘 생기고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지식을 두루 갖추고 과학을 이해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럴 때 "왕의 궁궐에 (능히) 설 수 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곧 흠이 없으며 잘생기고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지식을 두루 갖추고 과학을 이해하여 왕의 궁궐에 설 만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단1:4. 흠정역) 구약 성서에 "과학"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데 의아해 하실 것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KJV과 ASV에서 "Science"로 번역된 madda(מדע)는 명백하게 안다는 의미에서 'knowledge, thought'란 뜻을 갖는다. madda는 yada에서 파생되었는데, yada(#3045; ידע)는 전능자의 손(hand; יד) 과 눈(eye; ע) 이 합성된 상형문자다. 이는 Torah(성경)를 가르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