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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거하는 삶과 그 모습이란? 기존의 상념을 뛰어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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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어떤 "로망"을 품고서 기대한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 당연함 안에 천국은 어떤 곳이고, 그곳에서의 삶은 어떠할 것이라고 우리는 "공식"처럼 여기는 바가 있다. pixabay 천년 만년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삶을 영원불멸의 삶으로 간주하고서, 천국에 가는 이들은 이런 삶을 살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그곳은 형언할 수 없는 각종 진귀한 보석으로 꾸며져 있는 집(거처)가 준비되어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게 될 것이라 이또한 굳게 믿는다. ※ 그러다 보니 어떤 천국 간증을 들어보면, 자신의 집이 허름하기에 매우 낙심하였다고 전하는 분들을 보곤 한다. 그렇다는 것은 좋은 집과 나쁜 집이 나뉘고, 화려하게 치장된 집과 허름한 집으로 구분이 되기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그곳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일까? 그럼 천국에서도 부동산 투기는 여전히 지속되는 것일까? 그곳에서도 못 가진 자의 서러움은 사라지지 않는 곳일까? ohpopsi 필자는 할 수만 있다면 "생각하는 삶"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려한다. 천국에 대한 부분도 "스스로 묻고 질문하는 사고의 부분"이라 여기면서,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고 있을 법한 내용을 함께 나누려 한다. ※ 먼저 이전에 게재한 글 " 저주란 무엇일까? 죽음보다 더 저주스러운 삶. 그것은 단조로운 일상 "에 대한 글을 읽어보시길 강권합니다. 본 글에 대한 이해가 훨씬 풍성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Club Cleo 현시대는 고령화 시대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단편적인 사례를 이야기 해 보자. 며느리의 눈치를 보는 상황 속에서 노부부는 이른 아침을 먹고 곧장 근처 공원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매우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이미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나이드신 노인분

최고의 영업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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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게 다가온다. pixabay (이하 모두) 두렵다. 낯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그와의 만남을 피하게끔 이끈다. 하지만 만남을 피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기회는 사라져버린다. 두려움이란 낯설지만 그래도 그를 알아갈 수 있는 기회마저 소멸시켜 버린다. 나는 기대감을 품고 담대한 마음을 품고자 노력했다. 비록 두려움에 온 몸은 떨고 있지만, 죽으면 죽으리란 마음으로 그와의 만남을 피하지 않았다. 정면 돌파하여 극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가 다가왔다. 내 온 몸은 긴장감에 사로 잡힌 채 무엇하나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음성이 들린다. 내 귓가를 부드럽게 속삭이듯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내 온 몸을 휘감고 있던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두려움이 사라진 그 자리는 평강으로 가득했다.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을 해 냈기 때문이다. "내가 두려움을 극복했어!" "내가 낯선 사람의 방문을 피하지 않았어!" "낯선 사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어!" 등등. 한층 고무된 나는 얼마나 기뻐했을까? 낯선 사람의 얼굴을 잠시 살펴보니 그는 내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배고프세요? 식사를 차려오겠습니다." 그는 손을 저었다. "그럼 피곤하세요? 제가 침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손을 저었다. "이 과일을 드셔보세요. 기분이 좋아지실 겁니다." 그는 한사코 손을 저었다. 그리곤 내게 넌즈시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다. "제 속 사정 좀 들어봐 주시겠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a) "아~ 그렇죠.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당신의 사정도 모르면서, 제가 엉뚱한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기에 합당한 나. 그런 내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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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나 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자신의 생일날을 기대하면서 주변의 친구들에게 즐겁게 알리는데, 나는 내 생일을 부끄러워 했다. 주변 사람들이 알까봐 숨겼다. 그래서 나는 애써서 돈을 모왔다. 주머니에 돈이 가득할 손 싶으면 친구들을 불러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놀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주머니에 돈이 줄어가는 것을 느꼈다. 다시 채워 넣을 능력도,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내 몸이 불치의 희귀병에 걸려 버렸기 때문에. 그후 나는 모든 연락을 끊었다. 그 순간부터 칩거가 시작된 것이다. Photo by Isai Ramos on Unsplash 그렇게 세상의 모든 관계가 끊어지자 내가 예슈아를 보는 계기가 열렸다. 비록 내 수중에는 일말의 재물도 없지만, 예슈아를 만난 그 순간부터 재물없음이 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비록 가난한 자가 되었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몰골이 흉해졌지만,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가장 하찮다고 여겼던 내 모습이,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Photo by Greg Rakozy on Unsplash 예슈아께서 사랑하는 자, 예슈아로부터 가장 귀한 존재로 여김을 받는 것은 돈으로 평가되지도 않고, 건강으로도 평가되지 않으며, 오직 예슈아를 아는 그리고 알아가는 그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의 존귀함을 내가 스스로 깨닫게 되면서 나의 가치관은 서서히 바뀌어 나갔다. 교회(공동체)안의 더러운 (쓰레기가 가득한) 곳을 치울 때면, 예전에는 불평 불만을 늘어 놓던 내가 이제는 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나. 그런 내가 하는 일(수고; 헌신)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어야 한다.

저주란 무엇일까? 죽음보다 더 저주스러운 삶. 그것은 단조로운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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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youtube (이하 모두) 이렇게 시작된 그의 교도소 수감생활. 죽는 것보다 좋은 선택이 교도소 수감생활이라 여겼기에, 그의 마음 한 켠에는 여유가 있었다. 당초 예상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그의 수감 생활은. 과연 무슨 일이 있었길래 "수감 생활"보다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 살아남는 편이 죽는 것보다 좋다고 여겼던 그가, 왜 선택을 뒤바꾸게 되었을까? 누군가가 그를 못살게 때려서? 무서운 짐승에게 할큄을 매일같이 당해서? 아니다.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게 할 만큼 더 두렵게 만든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당시 교도소는 죄수들로 가득했었는데, 통제가 되지 않아서 너무나 힘들었었다. 그래서 교도소 운영자들은 " 통제 가능한 시스템 "을 찾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통제 가능한 시스템" 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때 영국의 기술자 "윌리엄 큐빗"은 통제가 가능한 시스템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기구는 참으로 단순했다. 그저 발로 밟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뒤에서 때리거나 앞에서 강제로 잡아 끄는 것도 없었다. 그저 단순한 동작 하나면 충분했다. 죄수들의 눈에는 너무나 간단했고, 그래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가뿐히 할 수 있는 운동보다도 쉬워 보였다. 그런데 단순하지만, 무한히 반복되는 그 일은 모든 죄수들에게 공포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단순한 일이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에레베스트 산을 등반하는 것과 같은 막중한 노동량에 시달렸다. 단순하기에 겉으로 보이는 노동량은 많지 않아 보였지만, 노동의 량은 달랐다. 대화가

은혜가 있는 곳에는 구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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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 비유를 보라. SlidePlayer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일은 "은혜"다. 가톨릭신문 그 이야기는  절대적으로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자가 (은혜를 받았던) "그 자리를 떠나(leaving)" 자신이 거하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온 내용 을 담고 있다. 마치 아브라함이 행했던 것(창12:1)처럼. 즉 교회(공동체) 또는 예배의 공간에서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 은 교회(공동체) 또는 예배의 공간을 떠나(leaving) 자신의 집 또는 직장으로 돌아 왔을 때 에 집중해 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는 은혜를 받았던 자가, (경험한 그대로) 은혜를 베푸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는데 모든 이야기는 귀결된다. 주님께 배웠지만, 실제 삶에서는 배운데로 살지 않은 자 를 향한 비유요 경고 메시지다. 배운데로 행하지 않은 자 는 " 그가 이미 받았던 은혜(구원)가 취소 "된다. 고로 구원은 은혜를 받은 곳에서 찾지 말고, 자신의 터전이요 자신이 은혜를 베풀어야 할 곳에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