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22의 게시물 표시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자에게 참된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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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님들이 오지로 선교를 떠날 때 가져가는 것이  한 손에는 복음과 다른 한 손에는 의약품, 그리고 인식을 새롭게 바꿔 줄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딛은 선교사님들 역시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들고 오셨다. 그때 세워진 학교가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이요 배재고등학교의 전신인 배재학당 등이다. 왜 그들은 오지의 땅에 교육 프로그램을 가져온 것일까? 오지의 땅은 온갖 샤머니즘에 의해 정신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그저 '이미 정해진 것' 또는 '운명'(예정설)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된다. 소위 한 번 종(노예)으로 태어난 자는 죽을 때까지 종의 신분으로 살아야 하고,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평생 양반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신(창조주)의 의도라는 것이다. 신의 의도를 벗어나면 끔찍한 하늘의 벌(천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태생 신분을 평생토록 지켜 나가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지어준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의 눈에 비치는 그와 같은 모습은 '저주에 빠진 노예의 삶' 그 자체다. 자신들의 삶에 대해 '의문을 품지 못'한 채 평생을 수긍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게 저주의 삶인 것이다. ' 나는 누구일까? ' ' 나는 이 땅에 왜 태어난 것일까? ' ' 나란 존재는 어떤 가치 또는 어떤 소중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 ' 저들은 내가 누굴 수 없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누릴 수 있는데, 왜 나는 누릴 수 없는 것일까? ' 양반들과 그 시대적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는 백성들이 이같은 의문을 품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차단해 왔다. 이를 위해 행한 가장 큰 것은 '종놈들에겐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노예는 무식해야 한다. 정치가 시민들을 상대로 우민화 정책을 펼치는 것과 같다.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예슈아를 사랑하는 그 마음. 이젠 그 크기를 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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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간에게는 욕심이라는 부분이 있다. 이웃에게 해를 주면서 까지 나의 욕심을 챙기는 것에 대해선 나무라는 게 옳지만, 이웃에게 해를 주지 않거나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않는다면 이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만큼은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욕심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런 가운데 10만원을 벌 수 있는 일과 1억원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상식 선에서 우리는 어떤 일을 선택하게 될까? 당연히 마음이 가는 쪽은 1억원에 상응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위험부담이라는 부분은 배제하기로 하자. 결혼을 한 이후 줄곧 혼자서 곰곰히 생각해 오던 부분이지만, 차츰 결혼 생활이 무르익어가게 되면서 확신으로 다가오는 게 있다. 누구와 함께 있을 때, 혹은 누구의 품 안에 있을 때 평안함을 느끼느냐는 점이다. 이웃 부인들과 함께 있을 때, 그 자리는 매우 조심스럽다. 혹시나 성적 비하 또는 성폭력에 해당하는 언행을 하지는 않을까 싶은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와 단둘이 함께있는 그 자리 만큼은 세상 그 어떤 곳보다 평안하다. 마음이 평안하고 몸도 자유롭다. 방귀를 뀌더라도 부끄럽지 않는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를 비하하는 말 자체도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상대를 높여줘야 겠다는 그런 의식적 행동도 갖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함께 하는 자리를 선호한다. 그 누구보다도 아내와 함께 이야기 하기를 선호한다. 이러한 나의 행동이 다른 주변의 남편들 눈에는 꼴불견스러워 보일 순 있겠으나, 어쩌겠는가.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그 마음의 수준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을.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가 예슈아를 사랑하는 그 행함에도 이러한 삶은 반드시 영향을 끼쳤다. 나는 누구보다 예슈아를 사랑한다. 교회의 목회자 분과 대화하기 보다는 예슈아와 대화하기를 선호한다.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예슈아께서 설명해 주시는 그 설명 듣기를 더 선호한다. 예언자의 음성을 듣기 보다는 예슈아의 그 음성 듣기를 더더욱 선호한다. 그렇기에 예슈아의 음성을 (목회자

다가오는 대선의 향방은 우리를 예슈아께로 인도하는 순풍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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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항해자다. 돛단배를 이끌고 동에서 서로 이동하려 한다. 세상을 등지고 예슈아께서 계신 곳으로 이동하려 한다. 어떻게 하면 예슈아께로 갈 수 있을까? 어떤 삶의 환경이 '주님의 인도하심'이라 말할 수 있을까? 돛단배는 바람이 불어야 머나먼 곳까지 항해를 할 수 있다. 그런 돛단배를 타고, 나는 예슈아가 계신 곳으로 가려고 한다. 예슈아께 나아갈 때, 예슈아께서는 먼발치에서 나를 (실은 돛단배를) 보시고 미리 나와 나를 마중하러 나오실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떤 바람을 타고 예슈아의 발 앞까지 나아오면 되는 걸까? 그렇다. 나를 예슈아의 앞까지 인도해 주는 그 바람은 세상으로부터 일어난 바람이다. 세상이 나를 향해 강하게 밀어주는 그 바람이다. 그렇기에 주님 앞으로 나를 인도하시는 것은, 어쩌면 예슈아를 믿는 나를 대적하기 위해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지 않을까? 나를 이끄시는 주님의 강한 손은 어쩌면 예슈아를 대적하려 하는 세상의 바람이지 않을까? 악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진행된다며 기뻐할 것이지만, 이로써 주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는 데 악인들의 행함 조차도 쓰시는 전능자이심을 모두에게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 아닐까?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2:8.개역개정 세상이 몹시도 어지럽고 평소 신뢰하던 있던 모든 것들의 신뢰가 무너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대선이 치뤄지고 있네요. 우리의 바램에 어긋나는 흐름, 세상에서 일어나 우리를 대적하는 바람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환경은 이미 조성된 듯 싶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라고 오늘의 글을 나눕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시기 위해 펼치신 강한 손이요 피난처입니다. 주님의 이끄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만 있다면, 그 이끄심에 따라 당신의 돛을 조절, 곧 분별하기만 하십시오. 바람과 돛의 조절을 통해 여러분은, 그리고 저는 예슈아의 앞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러니 두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어떤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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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명령이 어떠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기에, 맹목적으로 감사하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 '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저는 매일 매일을 감사하며 살아요 '라고 말한다.  이같은 사실이 언뜻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당신은 왜 감사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과 '당신의 경우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나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답변이 궁색하다. ' 성경이 감사하라고 해서 하는 것입니다. ' 성경은 로보트나 노예에게 지시를 내리고자 작성된 글이 아니다. 명령을 액면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그 명령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와는 상관없이) 의미없는 행동들만을 즐비하게 해 대는 그런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명령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서, 스스로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사려깊은 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는 자녀를 둔 부모의 모습과도 같다. 부모가 큰 아이에게 '너는 동생을 잘 챙여야 한다'라고 명령조로 말했다고 하자. 이는 아무런 생각없이 동생을 그저 챙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명령의 본질은 동생을 사랑하라는 의미다. 본질을 이해하면, '어떻게 하는 게 동생을 챙기는 것'인지 스스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매순간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릴 뿐이다. 이내 그런 순간들이 싫고 짜증나게 되면서 동생을 챙기는 일조차 방관하거나 거부해 버린다. |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공동체)는 상가 3층에 위치한다. 상가라는 특성상 주변을 지나는 행인들이 무척많다. 사람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주변은 지저분해진다. 온갖 헤아려 나누기 조차 어려울 정도의 각종 쓰레기들이며 옳지 못한 행동들을 일삼는 사람들까지 상가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