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권위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


Adam Payne


영적 권위라는 단어에 대해서 잘 아는 이들은 단연코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소위 권위라는 말로 주로 사용하는데, 권위자에게 순종하듯 복종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 여기면서 그와 같은 것은 즐겁게 종용한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생활을 하는 중에, 목회자 내지는 사역자 분들이 성도에게 다가와 어떤 부탁을 할 경우 '손살같이 순종'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믿음의 생활이라 모두들 그렇게 하기를 힘써 노력한다.

목회자 내지는 사역자 분들의 부탁에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니, 그 모습이 정말로 아름답던가?

우리는 목회자 내지는 사역자 분들의 부탁 또는 권면 등에 단연코 순종하는 것이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그럼 그 순종은 어디까지 진행되어야 할까?


이웃하는 교회(공동체)의 목회자에게서 옳지 못한 모습이 발견되어 세간에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하자. 그럴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교회(공동체)의 목회자나 성도들은 '자기 목회자가 그렇게 되기까지 무엇을 했을까?'라며 비난하곤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우리네들의 신앙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선 '목회자나 사역자 분들의 부탁'에 주저하지 않고 '아멘'이라 외치면서 순종하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회자나 사역자가 옳은지 혹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어느 순간에 얻을 수 있을까?




사실 목회자나 사역자의 부탁에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는 그 모습에는 '그분들의 부탁이 옳은지 혹은 그른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기회' 가 주어지지 않는다. '주저하지 않는 행동'이란 판단하지 안고 맹목적으로 행동하라는 뜻을 갖는다. 고로 우리들의 신앙은 '목회자나 사역자 분들에 대해선 일체 판단 내지는 분별하려 해선 안 된다'는 사항을 철저하게 금기시 하고 이를 불문율로 삼고 있다. 그러니 성도들은 목회자 분들이 그릇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당한다. 그러면서 이를 성도의 본분이라 여기면서 스스로 자신을 위로한다. 
하지만 세상은 이를 두고 어떻게 말하는가?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공동체)를 향해 '동성애를 옹호하고 이를 죄라고 부르지 마라'는 말로 화답한다. 그 결과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소수 인권 운동'을 강력하게 펼치고 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 상황인데, 동성애에 대해서는 어떤 근거로 죄라고 여길 수 있을까? 동성애를 합법화 하려는 시도는 정치권의 인사들이 추진하는 일이지 않는가?

목회자나 사역자 분들에게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정치권 인사들에게도 권위가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사람에게 영적 권위가 있다고 여기는 교회(공동체)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투영시켜 살펴보자는 뜻이다.


사람에게 영적 권위가 있다면, 정치인에게도 그 권위가 있을 것이다.

목회자에게 영적 권위가 있으니, 그가 하는 모든 말에 의문을 가져서도 안 되고 그저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정치권 인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둘러 보자. 교회(공동체) 가운데 자신들에게 있다는 영적 권위를 정치권까지 연장해서 해석하는 이가 있는지. 없다. 목회자나 사역자에게는 영적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치권 인사들에게 만큼은 권위가 없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정치권 인사들이 주장하는 '동성애의 합법화'에 대해 당당하게 반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는 동성애가 창궐했기 때문에 멸망한 게 아니다. 그 도시에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18:32)

자신의 욕심을 챙기려 하는 탐욕을 버리고, '약한 자를 배려하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며 가난한 자에게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삶'(사61:1~3)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이가 없었다는 뜻이다. 오늘은 내 물건이지만 하룻밤만 지나면 남의 물건이 되는 그런 삶이 일상인 곳에서 자기 자신도 아무렇지 않게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자신의 것으로 삼는 그런 일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행한다면, 어찌 그의 종교적 행실만으로 그를 의인이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애시당초 권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영적 권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의 욕심 내지는 자신의 밥그릇에 관련된 부분에 직면하게 되자 영적 권위에 대해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면서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점이 더욱 안타깝다.

허다한 성도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공동체)에서는 그들 성도에게 '설교자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허다한 성도들에게는 '설교자의 권위'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권위를 가진 목회자를 찾는다. 목회자에게는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만인의 인정함'이 있기 때문에, 이를 권위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교회(공동체)에서는 목회자 만이 설교자로 세워진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저 듣는 자들이 된다.

그럼 목회자는 어떤 이를 말하는가?
신학대학원이라는 곳에서 일정 기간 동안 신학을 배운 자들을 일컫는다. 소위 신학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통과한 자들이다. 그렇게 통과한 이들에게 목회자 시험을 치룰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그렇게 합격한 이들에게 목회자라는 칭호로 부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성도가 목회자인가? 아니다.
그럼 성도가 신학대학원에 입학해야 목회자인가? 그것도 아니다.
성도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서 목회자 시험에 통과했을 때, 비로서 목회자라 인정을 받는다.

그럼 목회자라는 타이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관련된 학위와 시험에 있는 것일까? 당연히 학위와 목회자 시험에 '권위'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거지와 왕자'라는 아이들 소설을 우리는 잘 안다.
마지막 대목에 가면 거지와 왕자가 궁궐 안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서 그간 바뀌었던 둘 간의 신분을 다시금 바꾸고자 한다.
하지만 주변의 신하들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
사람에게 권위가 있다면, 당연히 '거지가 가리켜 말하는 왕자님'을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그때 왕자는 '자신이 왕자인 것을 증명'(prove)할 수 있는 증거를 가져오게 되는데, 바로
옥새
를 가져온다. 오직 왕으로 인정받는 자 만이 지닐 수 있는 물건으로서, 다시 말해서 왕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내포하는 물건인 셈이다. 왕은 이처럼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을 소지 해야만 왕으로서 인정을 받는다.




결국 보물 상자가 귀중하게 대접 받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보물상자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보물이 귀하기 때문에 보물 상자는 소중하게 취급받는다.

그래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 부족 내지는 결여되었다고 생각된다면, 현직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오늘날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경험한 세대들이다. 대통령 역시 '대통령의 자격'을 소유할 때 대통령으로 인정을 받고, 소유하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탄핵되고 만다.

이를 교회(공동체) 안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영적 권위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서 말이다. 목회자가 야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동행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입술에 함께 하게 된다. 그때 목회자에게 영적 권위가 인정된다. 하지만 목회자가 자신의 생각으로 말을 한다면 그는 성도의 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형제와 자매일 뿐이다. 영적 권위가 없다는 뜻이다.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전하는 자에게 영적 권위가 깃들어 있는 것이지, 화려한 의복이나 지위를 지녔다고 해서 영적 권위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눅4:21~22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물론 예슈아께서 살아계시던 당시에도 이러한 사실이 깨달아진 것은 아니었다. 예슈아를 향해 '우리가 아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더냐?'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무슨 사회적 지위나 종교적 지위가 있느냐고 지적하며 비난하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만큼은 거부할 수 없다. 왜? 예슈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서 영적인 권위를 느꼈기 때문이다.

요10:34~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god)이라 하셨거든

주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만 영적 권위가 인정되고, 주님의 말씀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그저 한 인간일 뿐이다. 주님의 말씀에 영적 권위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소유하는 그릇이 있다면 그 그릇은 영적 권위를 인정받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소유하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그릇보다 더 비천한 신분이 된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40)

그래서 우리들의 관점은 화려한 외모와 눈에 보이는 지위에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주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쉬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이를 위해 출석하는 교회(공동체)의 목회자께서 부탁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과감하게 분별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리라 본다. 그것이 오히려 목회자 분들이 교만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될 것이며, 그렇게 모인 교회(공동체)는 주님만을 교회의 진정한 주인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14:29)

진정으로 아름다운 교회(공동체)는 영적 권위를 사람에게 세우는 곳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가지셨음을 인정하는 곳일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입술로는 '이곳은 주님의 교회(공동체)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행정과 사무의 결정은 자신들의 의사대로 행하여 성도들에게는 물론이고 세간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돌이키길 원한다.

특별히 예언을 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목회자가 되었든 사역자가 되었든 그리고 성도가 되었든 의견을 제시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영적 권위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이 구절은 성경을 읽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향해 주시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영적 권위는 오직 한 분에게만 있다. 그럼에도 영적 권위를 사람에게 건네주어 그 사람으로 인하여 헛된 일을 행하게 할 경우, 위의 말씀이 그들을 판단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영적 권위를 예슈아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은 밥그릇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자유로운 교회(공동체)의 사역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이 역사하실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목회자나 사역자, 그리고 성도들이 서로의 의견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그런 형제 자매간의 모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누구든 예언을 하는 이가 있다면 그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분별할 수 있는 목회자나 사역자, 그리고 성도 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의 말씀이 임하는 이가 그 순간 영적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는(preaching) 목회자(pastor) 만의 몫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목회자와 성도들은 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겠다. 단 분별이 어렵다고 여긴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목회자에게 설교를 일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순 있으리라 여길 수 있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분별의 과정이 어렵더라도 잘 극복함으로써 설교자를 세우는 일과 분별하는 일이 자유로운 교회(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날의 교계 안에서 논의 되기 쉽지 않는 내용이겠지만, 우리의 그릇된 열심이 우리 자신을 불사르는 경우로 전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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