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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jealous)하는 하나님? 정말로? 에이 아닌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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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jealousy)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신5:9) 성경 속 표현을 보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표현되어 있다. 사실 질투라는 뉘앙스는 그리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부정적 요소가 더 강하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의문을 품어보자는 취지다. 야훼 하나님에게서 부정적인 요소 혹은 악한 자의 모습이 있어야 할까? 가령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럼 사랑이신 야훼 하나님은 시기하지 않는 분이시다. 필자가 의문을 품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질투"라는 뉘앙스로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필요하리라 믿는다.  " 질투 "라는 의미로 해석된 jealousy의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면 "ardor, zeal, jealousy"의 의미를 갖는 qinah ( קנאה )로 표현되어 있다. 즉 qinah에는 jealousy 하나의 의미만 담겨 있지 않고, ardor와 zeal의 의미가 더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각각의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 ardor  Great warmth of feeling; fervor; passion.  Spirit.  Intense heat. ✔ zeal  The fervor or tireless devotion for a person, cause, or ideal and determination in its furtherance; diligent enthusiasm;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세대들이여. 예루살렘은 왜 이방인에게 밟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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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com/ko/users/Walkerssk-1409366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눅21:24b.개역개정) 예루살렘 성전은 거룩한 곳이다. 그래서 당연히 택함받은 백성, 곧 의롭다 일컬음을 받는 백성이 거하는 곳에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곳을 '이스라엘의 백성과 그들의 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한 가지 뜬끔없다 할 만한 질문을 한 번 해보길 바란다. 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인정받을 자'는 과연 누구일까? 야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이들은 과연 누구일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이스라엘 백성? 아니면 이방인? 과연 누구일까? 이같은 궁금증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갈3:8.개역개정)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Gentile)에 대해선 조건을 제시하셨는데, 믿음있는 이방인들에 한해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아브라함을 택하기 보다 훨씬 이전에 계획되었다. 창세전에 이미 계획되신 일을 성경(성령)께서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셨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행7:2b.개역개정)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개역개정) '땅의(or 땅에 속한)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아담의 눈에 비친 에덴의 동산 너머 그 세상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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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또는 논리적 비판(분석)은 자신이 이미 잘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해 부족한 것을 보게 하고 이로써 더욱 분명하고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깨달음을 준다. 즉 새로운 차원으로 인식을 확장시켜 준다. 우리에게 얻어지는 깨달음이란 사려깊은 고민 등을 쉬지않고 행할 때, 생활 속에서 불현듯 만나는 무언가로 인하여 얻게 된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는 중에 깨달음을 얻었고, 뉴튼은 떨어지는 사과를 봄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의 힘을 보았던 것처럼. 오늘의 나눔은 이같은 측면에서 독자 여러분들에게 좋은 동기가 될 줄로 믿는다. 아담과 그의 아내 '여자'는 에덴의 동산에서 살면서 동산 너머의 풍경은 볼 수 없는 상황이었을까?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거나 혹은 끝을 알 수 없는 울창한 숲으로 가려져 있었을까? 만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면, 이같은 논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야 한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둘레에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덩이를 만들어 놓는다면, 어느 누가 가까이 접근하려 하겠는가? 이게 아니라면 벌거벗은 상황일진데 매우 크고 단단한 가시덩쿨이라도 그 나무의 주변에 둘러 진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불가능하진 않겠다. 그런데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전하는 기본 전제가 있다. 그것은 ' 강압적인 힘으로 순종을 이끌어 내는 건 옳지 못한 일이다. ' 라는 사실이다. 통치자는 백성을 그들의 소유로부터 몰아내려고학대를 통해그들의 상속 재산을 취하지 말며 ...(중략)... 내 백성이각각 자기 소유를 떠나 흩어지지 아니하게할지니라. (겔46:18.흠정역) 그래서 먼저 상대가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수긍)'할 수 있도록 헌신이나 배려 등의 수고를 베풀게 한 후 상대가 기쁨에 넘쳐 스스로 순종하게끔 이끌어낸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신앙 수준이 높은 이들을 향한 주님의 강력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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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Liane Metzler on Unsplash 교회(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경륜이 높(아 보이)은 분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인자한 미소와 당당하게 행하는 섬김의 모습들은 누가 보더라도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한다. "저 장로(또는 집사, 권사, 성도)님은 반드시 휴거 되실거야" "저 분은 꼭 천국에 들어가실 거야" 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부러운 마음에 그분들을 바라본다. '부러운 마음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지는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나도 저분들처럼 신앙의 경륜이 높아지기를 바래야지' 라는 힘찬 결단을 한다. 그럼 생각해 보자. 성경은 신앙의 경륜이 낮은 이들에게 권면과 위로와 덕을 세우기 위해 기록된 글을까?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말을 바꿔서 '신앙 경륜이 낮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글을까?'라고 되묻는다면, 이는 그릇된 말이다. 성경은 신앙적 경륜이 충분히 높다라고 여겨지는 이들을 향해서 매우 무섭게 경고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로 이같은 부분들을 '신앙의 경륜이 낮은 이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알려지고 이해되어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https://pixabay.com/ko/users/CCXpistiavos-4540068 | '일만 달란트의 비유'를 기억해 보자. 비유의 모든 내용이 전개되었을 때,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되는 이'가 누구인지 짚어 낼 수 있겠는가? 일만 달란트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18:23~34(개역한글)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