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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비하인드 스토리] 두 형제의 말할 수 없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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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정의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Photo by Edward Cisneros on Unsplash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들이 그가 말하는 것처럼 되는 '권위적인 삶'(창2:19b)을 살아 온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벗어나 자신의 원하는 바대로 가정을 꾸려나가고자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권위를 벗어나지 못하연 늘 전전긍긍하시는 어머니(창3:16b)를 둔 두 형제의 이야기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창2:19b.새번역)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창3:16b.새번역)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하도 늘 먹을 것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가장 좋은 것을 보면 늘 '가족에게 먹이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가지시는 그런 분이셨다. 하루는 들녁을 거닐던 중에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러운 과일 나무를 발견한 어머니는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창3:6a.새번역) 곱디 고운 탐스런 과일을 따서 양손 가득히 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이것을 아이들에게 먹이면,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을거야 " " 아이들이 잘 자라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 " 와 같은 부푼 꿈을 꾸니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게만 느껴진다. 집으로 들어온 어머니는 깨끗한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과일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을 불렀다. " 식탁에 맛있는 과일을 준비했어요. 와서 드세요 " 어머니는 식탁에 턱을 괸 채로 남편과 아이들을 넌즈시 바라본다. 그리고는 ' 엄마. 정말 맛있어요! ' ' 여보. 정말 맛있는걸! ' ' 엄마 정말 대단해요. 당신 정

바빌론의 음녀의 이름이 깃든 트랜스포머의 범블비. 우연히 등장하는 이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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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투스라고 알려진 물고기의 원래 발음은 wikipedia '이크튀스'로 발음되는 그리스(헬라)어로서, 마치 사행시를 연상할 수 있는 '특정한 문장의 첫 알파벳'들을 떼어내어 만든 단어다. Ι ησους  Χ ριστος  Θ εου  Υ ιος  Σ ωτηρ 발음은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 로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라는 뜻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물고기  ἰχθύς  이크튀스(익투스)라는 단어를 먼저 생각해 놓고서, 그에 맞는 의미를 사행시로 연결한 것은 아니었까 싶다. ​ 그래서 그 여자의 이마에 한 이름 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 하였더라. (계17:5.흠정역) 의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라는 내용도 이처럼 사행시로 구성된 특정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론하려 한다. 만일 이같은 추론을 통해 어떤 단어가 드러난다면, 그 단어는 음녀의 이마에 기록된 '한 이름'과 깊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해당 문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ΑΠΟΚΑΛΥΨΙΣ ΙΩΑΝΝΟΥ 17:5 Greek NT: Nestle 1904 καὶ ἐπὶ τὸ μέτωπον αὐτῆς ὄνομα γεγραμμένον, μυστήριον,  Β ΑΒΥΛΩΝ Η Μ ΕΓΑΛΗ, Η Μ ΗΤΗΡ Τ ΩΝ Π ΟΡΝΩΝ Κ ΑΙ Τ ΩΝ Β ΔΕΛΥΓΜΑΤΩΝ Τ ΗΣ Γ ΗΣ.  biblehub 그리고 이것을 'ΑΠΟΚΑΛΥΨΙΣ ΙΩΑΝΝΟΥ 17:5 Greek NT: RP Byzantine Majority Text 2005'의 버전으로 바꾸면, Β αβυλὼν ἡ μ εγάλη, ἡ μ ήτηρ τ ῶν π ορ

삶의 숨겨진 key point를 찾아 나 자신을 축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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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란 principle로서 원리라고도 불린다. 이는 자연의 섭리 또는 창조의 질서가 운영되는 지혜(wisdom)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이것이 원리를 터득해야 하는 부분이다. 모든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본이 되는 사실, 곧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원리(지혜)를 깨달을 때, 그 원리에 순응(순종)하여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을 우리는 '이해'(understanding; 명철)하고 말한다. 원리를 모르면 시험문제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지혜가 없다면 창조주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낼 수 없다. Photo by Silas Köhler on Unsplash 그래서 모든 시험은, 그리고 삶 속의 모든 문제의 핵심(key point)은 바로 '원리'(priciple; 지혜)에 있다. 이를 다시 설명하자면, '원리로 설명되지 않고, 원리에 따라 행하지 않는 모든 풀이과정은 틀린 답이다'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성경 속 표현으로 옮겨 적으면 '지혜에 순종하여 행하지 않는 생활 속의 모든 행위는 헛된 것이며 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창조의 원리' 또는 '창조주의 지혜'를 찾아야 하면 이를 깨달아야만 한다. 이를 위해 애쓰는 대표적인 이들이 있으니, 그들을 학자라고 말한다. 왕이 자기 내시들의 우두머리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중략)...곧 흠이 없으며 잘생기고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지식을 두루 갖추고 과학을 이해하여 왕의 궁궐에 설 만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 (단1:3~4.흠정역) Image by TeroVesalainen on Pixabay ☞ TeroVesalainen on Pixabay 왕

우리는 왜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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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Icons8 team on Unsplash 하찮은 내가 청와대에 가서 뜬금없이 '대통령은 지금 당장 비상국회를 소집하시오'라고 말한다고 해 보자. 어느 누가 나의 말에 수긍할 수 있겠고, 나의 말대로 따라 행할 수 있겠는가? 잘 나가는 드라마가 있다. 그 안에서 A남자와 B여자가 아름다운 연인으로 발전할 것처럼 보였는데, 뜬금없이 A와 C가 연인이 되는 것으로 드라마가 끝났다. 이럴 경우 시청자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안다. "개연성이 부족하다" "스토리 빈약하다" 는 등의 악평을 듣게 된다. 시청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전개 과정'도 주지 않고, 그저 결론(Final)만 말한다면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Image by qimono on Pixabay ☞ qimono on Pixabay 성경이 전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평소 은사적인 모습이 전혀 없었고, 성경에 대해 그리 깊은 조예나 경륜도 없던 내가 기도하는 중에 "너희 교회(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을 향하여, '이 교회(건물)을 당장 팔아서 OOO 장소에 터를 잡아 새롭게 건축을 하여라' 는 말을 전해라" 는 주님의 음성이 느닷없이 들려왔다고 하자. 그래서 목사님을 비롯하여 모든 성도분들을 모와 놓고 이같이 말했다. 나의 이같은 말에 사려깊게 수긍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열이면 열 모두가 '꿈을 꾸셨군요.'라고 하거나 '앞으로 좋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네요'라는 다소 비난하지 않으려는 듯한 질책섞인 어조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는 모두가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로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게 다시금 다가와 다소곳하게 앉으며 " 당신의 말에는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그러니 좀더

인격적인 관계의 시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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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enjaminrobyn Jespersen on Unsplash 부부의 인연은 계급을 토대로 시작되지 않는다. 신체적 조건도, 재정적 조건도, 사회적 명성조차도 조건이 아니다. 사랑하는 단 하나의 마음이면 충분하다. 자신의 몸을 장식하기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도, 능히 사랑할 수 있는 관계다. 이것이 인격적인 관계의 첫 출발이다. 사랑 하나 만으로 시작했기에 신혼의 순간에는 보잘것 없이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거대한 선물을 안고 있는 이들로 성장한다. 세상의 허물을 품어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부부 가 되어 인격적인 관계의 참된 모습을 선사한다. 가정에서 우리는 인격적인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인격적인 나. 인격적인 너. 그리고 합력하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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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sasint on Pixabay ☞  sasint on Pixabay 이 세상에는 어른이 있고 아이가 있다. 아이들은 아는게 (비교하지면) 심히 부족하고 약하다. 반면 어른들은 아는게 많도 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른들은 '모든 것을 다 안다'라고 말할 수 없고, 어른들은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어른과 아이 모두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모르며, 부분적인 강하고 부분적으로 약하다. 고로 앎과 모름이 조화(harmony)를 이루고 있고, 강함과 약함이 균형(balance)을 이루고 있는게 어른과 아이 할것 없이 모두의 상태다. Photo by Ludomil on Unsplash 그렇기에 지도자를 세운다 할지라도 지도자 또한 이러한 harmony와 balance 안에 속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즈음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지도자 또는 목회자에게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이 있을까? Image by Michi-Nordlicht on Pixabay ☞   Michi-Nordlicht on Pixabay 어떤 지도자도, 어떤 목회자도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 '앎과 모름의 조화'와 '강함과 약함의 균형'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독불장군'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서로 협력한다면, 나의 앎으로 상대의 모름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고 나의 모름을 상대의 앎으로 강한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는 삶의 모습(역사)이 바로 지도자와 책사의 관계이고, 책사와 무사들의 관계이며,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 라 생각한다. 물론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더 많은 관계성들이 있다. Photo by rawpixel on Unsplash 교회(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