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19의 게시물 표시

"우리애~"라고 불러준 것 만으로 마음의 벽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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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혼자라고 생각했다. 미생의 한 장면 그래서 세상을 향해 커다란 벽을 쌓고서 자신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는 혼자다. 그는 외톨이다. 그는 피해자다. 그는 소수인권이다. 그런데 함께 할 수 없을 것으로만 여겼던 곳에서 나를 향해  우리 애~ (내 동료) 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외톨이었던 나'를 '자신의 동료'라고 불러줬다. 그러자 세상과 단절되었던 그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단지 나를 동료라고 불러줬을 뿐인데. | 상처입은 누군가를 대할 때면, 그의 허물을 드러내기 보다는 저도 당신과 같습니다. 라는 공감을 해 주세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 공감을 받을 때, 외톨이가 쌓아 올렸던 그 거대한 마음의 벽은 외톨이였던 자기 스스로에 의해 허물어지게 되닌까요. ​ 공감, 소통, 대화, 인격적인 만남. ​서로 다른 이 모든 표현들이 사실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는 그 계명의 실천방법인 것을 아시나요?

언약 안의 백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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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Oscar Ivan Esquivel Arteaga on Unsplash 언약(covenant)이란 말은 약속(promise)이라는 말과 유사한듯 하면서도 매우 다르게 사용된다. Covenant는 웹스터 신학 사전 (Webster Theology Dictionary)에 따르면 "의무와 상호 책임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두 진영 간의 공식적인 합의"를 의미하고, Promise는 무언가를 해야 할 의무, 또는 하지 말아야 할 의무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로써 Covenant는 '당신의 가족은 내 가족이 되고, 나의 가족은 당신의 가족이 된다'는 결혼과 같은 새롭게 출발하는 관계의 수립을 지향하고 Promise는 '앞으로 지각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라는 식의 지켜야 할 의무를 확신시키는 것이다. Photo by Julie Johnson on Unsplash 하지만 약속이 미래에 일어날 일과 연결되어 있듯이, 언약 또한 미래와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성취될 그 무엇을 언급하는게 아니고 정한 기간이 지나야만 그 실체를 볼 수 있다는 속성이 있다. 이는 아내가 아이를 잉태하는 시점과 출산하는 시점이 다른 것으로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아이를 잉태하는 시점은 언약을 체결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는데 반해 아이를 출산하는 시점은 언약이 성취되는 시점이다. 따라서 언약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하는 '마법적 창조의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인내 또는 연단이 있는 시련(내지는 성화)의 과정이 열매 맺는 삶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연의 섭리 또는 창조의 질서'에 의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고로 언약은 3단계의 기간을 담고 있다. 씨가 땅(심령)에 뿌려지는 단계와 씨가 죽어 싹이 나고 자라서 줄기와 잎사귀를 내는 성화의 단계, 그리고 가장 탐스러운 극상품의 열매를 맺는 결실의 단계로 구

경매 유예 제도의 양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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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주변에서 검색 가능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설명되는 개인적인 견해입니다.충분한 가능성을 제시하였을지라도  독자 여러분 스스로가 추가 자료를 수집하심으로써 모든 내용들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분별하시기를 강권합니다. 주택담보대출의 원리금을 제때 상환하지 못하는 서민들이 있다. 정부는 이러한 취약계층의 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금융회사가 연체자들의 집을 바로 경매에 넘길 수 없도록 최대 1년간 담보권 실행을 늦춰주는 대책'을 세웠다. 이로써 연체자는 1년이라는 유예기간 동안에 보다 나은 가격으로 주택을 처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경매 유예 제도는 이처럼 서민의 생활 안정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안전장치로서 여겨진다. 이로써 은행권으로부터 대출을 해야 하는 이들은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고사성어 가운데 조삼모사라는 내용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려움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려움에 처한 그는 뜻하지 않게 원숭이들의 먹이가 부족해지는 일을 겪게 되었다. 원숭이를 시장에 내다 팔 수 없는 상황에서 사육을 유지해야 하는 그에겐 원숭이들의 먹이감이 줄어든 일은 무척 큰 고민이다. 고민 끝에 그는 원숭이들에게 지급하던 배급량을 줄여야 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종전에 얼마의 배급량을 지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의 도토리를 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랬더니 원숭이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래서 저공은 배급량을 바꿔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 말은 들은 원숭이들은 매우 흡족해 했다. 이 고사성어가 의미하는 바는 해석하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열악해진 상황은 바뀌지 않고 눈 앞의 현실만 바뀌었을 뿐인데 이러한 술책에 고스란히 속아 넘어가는 우둔함을 비꼬는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다른

외모를 보지 말고 그의 마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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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개역개정) 야훼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중심은 무엇이며 사람이 보는 외모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렇듯 성경 말씀 하나 하나를 대할 때, 궁금함을 갖고서 더욱 깊은 의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시도해야 하리라. 다윗은 허다한 일들을 했다. 야훼 하나님께서 명하여 시키신 이들부터 그가 야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했던 일들, 그리고 그가 실족하였던 모습들을 보면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런데 야훼께서 다윗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은 다르다. 하나님이 ...(중략)...사울을...(중략)...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중략)...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1~22.개역개정) 다윗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는 거론하지 않으신다. 왕으로 세움 받기에 합당한 일들을 열거하지 않으시고, 그저 간단한 외마디만 하셨는데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야훼께서 다윗을 증거한다고 하신다.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pixabay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볼 때, 그가 행한 사역 그리고 사역으로 인해 부가적으로 발생한 결과(들을 열매로 말하는 그것)들에 주목한다. 사역과 사역의 내용을 보고서 '그 사람은 믿을 만 해'라고 말한다. 외형적으로 드러난 사실들을 보는 것으로 사람의 중심을 지레 짐작하듯 판단한다는 것이다. Photo by Aditya Romansa on Unsplash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먼저 보시고서 외형적인 것들을 판단하신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개역개정) 그래서 필자는 나 자신은 물론 모든 여러분들과 함께 권면(훈계)를 듣길 원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은 어디에서

후회없는 하루를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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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Cristian Newman on Unsplash 후회란 천국을 바라보면서 지옥을 느끼는 것이다. 토마스 무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천국을 보고도,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을 보면서도 지옥을 연상한다는 그 자체.​ 이것이 후회스러운 삶을 사는 자다. 그가 바로 어디를 가든, 비록 그곳이 천국일지라도 그는 지옥 속에서 사는 자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Photo by Joey Thompson on Unsplash 기대(소망)를 품는 자는 지옥을 보고도 천국을 생각한다. 기대감이 있는 자는 어떤 상황 속에 처하더라도 그곳이 장차 천국으로 바뀔 거라는 삶의 소망을 품게 된다. 그래서 (천국을 보며 지옥을 생각하는 이들과 다르게) 그들은 지옥 같은 삶 속에서도 배려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먼저 용서하길 힘쓰고 먼저 칭찬하기를 애쓴다. 그리고 자신의 흘린 땀방울을 닦아내면서, 그 땅에 장차 오게 될 천국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는다. Photo by Ben White on Unsplash 오늘 하루,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는 제게 큰 도전을 주시는 주님의 권면입니다. 이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분들과 나누길 원합니다. 작지만, 사소하지만, 자존심을 세우기 보다는 먼저 '미안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먼저 '제가 하겠습니다.'하면서 섬기는 그런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팩트는 진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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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팩트; fact)이란 진실(true)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즘 핫한 단어를 찾아보면 '팩트'(fact; 사실)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팩트라는 말과 진실이라는 말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 코끼리를 예로 들어보자. Photo by David Clode on Unsplash 코끼리의 코만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옆에는 코끼리의 꼬리만을 보는 사람이 있다. 또 그 옆에는 코끼리의 앞 오른쪽 다리만을 볼 줄 아는 이가 있다. 이처럼 코끼리의 모든 수족들을 부분적으로만 보는 이들이 있다고 하자. 이들이 보는 코끼리의 부분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사실(팩트; fact)이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들은 팩트요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의  팩트가 코끼리 전체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 팩트 한 가지(예로 꼬끼리의 앞 오른쪽 다리)가 코끼리 전체와 동격인가? 아니다. 아무리 많은 팩트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낱개 그 자체로만 존재할 경우에는 '그 팩트들이 코끼리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해서도 안 된다. Amazon.com 팩트는 팩트일 뿐 진실 또는 완전함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팩트라는 단어는 '사실'이라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는데, 이를 (한 사건의)'증거'라고 표현해 보자. 그러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 질 수 있겠다. 곧 완전한 그림을 이루는 하나의 퍼즐(부분적인 것)이라는 측면으로. 따라서 팩트를 아는게 진리(또는 진실)를 알고자 하는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노력의 끝'이 되어선 안 된다. 하늘에 오로라가 펼쳐진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았다. 이것은 팩트다. 사실이다. NGV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더욱 진전해야 할 것인데 '오로라가 왜 생기지?'라는 등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