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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좋아지는 아내의 모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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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심이 좋아진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만큼은 어느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신앙적 욕심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들이다. 누군가의 신앙이 좋아졌다고 할 경우, 가장 명확하고 간단한 표현 하나로 그의 신앙심을 이해 가능한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 모두가 그러한 질문에 대해 능히 답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을 믿는 우리는 예슈아를 우리의 구원의 주(主)로 영접한 자들이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主)라 부르며 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벧전3:6a.흠정역) 그래서 우리의 신앙심이 날로 날로 좋아지게 될 경우, 공통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예슈아가 너무 좋아요." "예슈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길 원해요" "예슈아께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 되길 원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예슈아의 신부로 간주하는 이들'의 마음에서 우러난 고백이다. 그럼 이 사실을 인정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할 수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20:12.개역개정) 눈 앞에 있는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자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의 축복이 임한다. 이는 눈에 보이는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분을 볼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이에게 선을 행할 줄 아는 이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분에게 선을 행할 수 있음이 증명되는 것과 같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막9:37.개역개정) 성경은, 그리고 예슈아께서 말씀하신 바는 이처럼 간단하다.  눈 앞의 증거들은 정확히 감춰진 보물을 가리킨다.  눈 앞에 있는 남편에게 대하는 그 자세가 보이지 않는 남편, 곧 예슈아께 행하는 것과 같다. 그럼 신앙심이 나아지면 나아질 수록 아내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될까

영접 기도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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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공동체)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중에 '영접 기도'라는 내용문을 주고서 읽으라 하는 경우가 있다. 그 기도문을 읽고 나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길거리 복음 전도의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교회(공동체)안에서, 특히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중에도 일어나는 일들이다. | 영접 기도가 그토록 대단한 것일까? 영접 기도문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구원에 이른다면 '이 세상 어느 누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겠는가?'라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상식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이미 식상해 버린 듯 혹은 체념해 버린 듯 혼잣말로 중얼 거리겠지. '개나 소나 다 가는 천국이라면, 선하게 살았든 악하게 살았든 누구나 가는 천국이라면 나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 그곳은 최소한 내가 아는 천국은 아닐 테닌까.' 하지만 교세, 특히 교회의 지지세력을 넓히려는 정치적 활동에 관심이 집중되다 보면 교회 사역자 분들은 물론 성도 분들도 영접 기도문에 집착하게 된다. 영접 기도문을 많이 읽히게 해서 자기 교회(공동체)에 소속된 구원받은 이들을 많이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라며 확실하게 말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리고 혹시나마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해 주는 이를 교주로 섬기게 된다. 그 교주의 마음에 드는 행동만 하면 구원은 쉽사리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주는 '영접 기도'라는 형식을 빌어 자신의 교세를 확장하려 할 뿐일테다. 영접 기도문을 읽었다는 자체만으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는 최소한 스스로에게나마 질문을 해 봐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 질문에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면, 반대의 상황에 대해서도 질문을 해 봐야 하리라. '영접 기도문을 읽은 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

신뢰(faith)가 믿음(belief)과 혼용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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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심이 있는 우리들은 흔히들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무조건적인 수준으로 여긴다. 즉 주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의문달지 말고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나도 그랬었다. ​ 그런데 말이다. 신뢰라는 단어를 곰곰히 되새기다 보면,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 쉽게 말해 누구 하나 속이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신뢰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거며 그런 세계에서는 신뢰라는 단어 조차 언급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신뢰라는 단어를 강조하거나 언급하는 일이 없다 할지라도, 누구 하나 약속을 어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온 세상이 도둑질과 속이는 일들로 가득한 세계가 있다고 하자. 누구 하나 믿음(belief)을 줄 만한 자가 없거나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자 그런 사회를 거부하고 싶은 이는 모두를 향해 부르짖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 모두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약속을 먼저 지켜 나가자고 말할 것이다. 서로간의 약속이 잘 지켜진다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경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신뢰가 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뢰를 강조하는 세계는 약속을 지키는 이들이 거의 없고, 따라서 믿음을 줄 만한 이들이 거의 없는 그런 세계임이 분명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뢰가 갖는 값어치를 나름 정확하게 표현한 내용이 있다. ​ 천재왕자의 적자국가 재생술 中에서 그렇다. 야훼 하나님의 음성이 내게 들려 왔을 때, 의문을 가질 수 조차 없을 만큼 분명한 내용이라면 어느 누가 분별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느 누가 '이루어지지 않을 지 몰라'라며 우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게 야훼 하나님의 음성과 속이는 자의 음성이 함께 섞여서 들린다면 어떻게 될까? 또는 야훼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시대적 상황대로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정반대의 상황처럼 흘러가는 시대적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12 제자들은 너나할거 없이 예슈아께서 왕으로 입성하게 되실 거라 믿었고, 실제 예루살렘 성에

권위(authority)는....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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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또는 권위자 등에 관한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하고 들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란_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정이다. What is the exact meaning of Authority? 캠브리지 사전에서는 ' the moral or legal right or ability to control '이라는 말로 설명(정의)하고, 웹스터 사전에서는 ' the power to give orders or make decisions : the power or right to direct or control someone or something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두 설명의 공통적인 요소를 간추려 보자면 Authority is legal right or the power of right. 으로서, 권위는 합당한 권리요 그 권리가 갖는 힘이다. 이러한 사실은 명확한 듯 하지만 매우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어제 아들녀석에 그 또래 아이들간의 불화로 인해 그 부모들과 대화를 나누고서 마음은 불편했었다. 아들의 잘못은 곧 아빠인 나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어제 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잘못없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듯이 누군가는 동기를 제공했고 그 동기에 자극을 받은 누군가는 결과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라는 이름 앞에서는 공정하게 논하기가 매우 어렵다. 오해가 있더라도 참고 견디는 게 좋은 모습이라 여기는 것이 대한민국의 신앙 공동체가 갖는 주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릇된 원인을 바로 잡기 원한다면, 그 상황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원인 규명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본다. 그렇기에 나 스스로 아빠된 도리에게 그릇된 점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살펴보느라 밤을 지새우다 싶이 했다. 아침에 아들녀석을 데리고 집 근처를 산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