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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의 국화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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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빵. 추운 겨울날 구수한 입맛을 더해 주는 간식이다. 허나 다른 의미로도 사용된다. pixabay (below all) "지 애비와 새끼가 똑 닮았네. 닮았어." "누가 머라해도 국화빵이네~ 국화빵이여" 동네 앞을 지나가는 두 부자지간을 바라보며 옛 어른들이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다. 현대인들은 이 표현을 다른 말로 바꿔서도 부른다. "DNA검사 할 필요가 없네" 이런 말을 들으면 모든 이들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부정하거나 나쁜 뜻으로 조소를 머금은게 아니다. 너무나 기특하고 아름다운 모습이기에 갖는 미소다. 허나 이러한 말은 아빠와 아들이 하나의 몸이란 뜻으로 사용된 것일까? 아니다. 그럼 아빠의 모든 모습과 속성에 대해서 마치 복사(Ctrl + c)해서 붙여(Ctrl+v)한 것처럼 여길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한 것일까? 이것도 아니다. 그저 모습의 또는 생활 속 습관에서 같은 경우가 겨우 몇 군데만 나타났음에도 사용된다. 몇 부분만 아빠의 모습 그대 곧 아빠의 참된 모습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모든 이들은 당연히 "닮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신앙의 지표다. 나는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성경 속 인물이 절대로 될 수 없다. 특히 예슈아는 더더욱.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예슈아께서 (마음을 다하여) 행하셨던 모습 중 몇 가지만 내 삶에서 나타날지라도, 마지막 심판이 있는 그 순간에 "너는 예슈아와 닮았구나!" 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것이면 족하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부모는 "너는 이 아비보다 더 뛰어나고, 아비가 했던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행할 것이다" 고 격려하기를 쉬지 않는다. 여러분. 완벽한 100%의 닮은꼴을 이루려 애쓰지 마십시오. 그런 닮은꼴은 절대로, 평생을 다해도 이룰

속박된 삶에서 벗어나 자유하기를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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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매일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을까? 혹은 마음의 짐이 되는 어떤 일로 인하여 속박된 삶을 살고 있는지 않는지 매우 궁금하다. 필자 또한 속박된 삶을 살았었고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삶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How? 어떻게 벗어날 수 있지? 라는 질문은 늘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여기에 좋은 답변이 있다. 명쾌하고 시원한 답변이다. youtube (below all) Casting all your care upon him ... (1 peter 5:7) cast는 '마법을 부리다' 또는 '마법을 시전하다, 마법을 (어떤 상대를 향해) 던지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성경이 마법을 따라 행한 건 아니고, 마법이 성경의 말씀과 그 행함을 따라 행했다. 그래서 마법이 행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성경에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들을 깨달아 볼 수 있다. 주님의 어깨에 우리의 모든 집을 대신 짊어달라고 cast해야 한다. 곧 예슈아를 믿기에, 그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된다. 예슈아를 믿는다는 것은 평소 예슈아의 음성을 듣고 분별할 수 있는 자를 뜻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예슈아와의 친밀감이 존재한다. 예슈아와 친밀한 자는 그가 부르는 예슈아의 이름에 권능이 있다. 그가 예슈아의 이름을 부르는 그 행위는 다름아닌 선포(declare)요 권능을 행하는 것(cast)이다.

축복을 받고 싶다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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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Nathan Dumlao on Unsplash 축복. 누구나 원하고 원하는 것. 심지어 악한 자들 조차도 축복을 받고 싶어한다. 이 정도면 (축)복이 갖는 매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그런데 복을 받는 방법을 모른다. 복을 받는다면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자신이 가장 먼저 받겠다고 줄을 서는 열심이 은사자 분들의 집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성령님이 운행하신다는 곳에서도 자기가 먼저 복을 받겠다고 여기거나 혹은 먼저 복을 받으면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곱절의 양으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가장 먼저 줄을 섰고, 가장 먼저 기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이 임하지 않는다. 몹시도 허전할 뿐이다. "한 번 더 줄을 서서 기도받을까?" 사자를 잡지 못했다고 안타까워만 한다면 그는 무지한 자다. 다양한 실행착오를 겪더라도 사자 잡는 법을 알아내는게 지혜 중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너무 허기져서 일어날 힘도 없는 이에게는 (율법이 아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을 주어야 함이 옳다. 그러나 일어설 힘이 있는 자에게는 물고기를 주는게 아니라 낚시하는 법 을 알려 주는게 현명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참 자유를 선사하는 것 이기 때문이다.      ※ 단, 배부른 자(돼지)에게 낚시를 알려 주면 그는 낚시하는 방법을 하찮게 여긴다. 그래서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투털대고 가르치는 이를 해하려 한다. 하지만 적당히 배고픈 자는 다르다. 일어날 힘은 있으나 배가 고파서 낚시하는 법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그는 가르치는 이의 가르침을 무시(ignore)하지 않고 스승을 인격적으로 대한다. 스승을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과 자세는 오로지 배고픈 자 만이 낳는 삶의 참된 모습이다. Photo by Timothy Eberly

소문 그리고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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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ient Origins | 스바(saba)의 여왕과 솔로몬에 관한 소문(증언) 열왕기상 10장 6. 왕에게 이르되, 내가 내 땅에서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지혜에 관하여 들은 소문이 참되도다. 7. 그러나 내가 와서 내 눈으로 그것을 볼 때까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그들이 절반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당신의 지혜와 번영이 내가 들은 명성을 능가하는도다. pixabay 스바의 여왕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땅에서 사는 동안,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지혜를 들었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으로 이미 다 이루신 창조주 하나님의 행적과 그 지혜를 '땅에서 사는 동안' 전해 들은 것과 같다. 그녀는 그 소문들을 거짓으로 치부하진 않았다. 다만 그 소문이 진실 그 자체라고 믿지 않았을 뿐.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 것과 거짓이라고 여기는 것은 다르다. 거짓이라 여긴다면 그 소문의 진위여부를 판명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 소문이 거짓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없다. 허나 소문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 진위여부를 알아보고자 노력했다는 것은 소문의 내용 외에도 전해지지 않은 또 다른 놀라운 사실들이 있을거라는 기대감을 갖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처럼 여기는 이는 소문을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소문이 가리키는 그 실체를 자신이 직접 보고야 말겠다는 강한 도전을 불러 일으킨다. |  그런 이는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다. 사실 소문 속의 내용이 그에 관한 놀라움의 전부라면, 더 이상 궁금증이 일어날 수 있을까? 없다. 그런데 "소문이란 단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라고 여긴다면, 그는 아직 듣지 못한 내용들을 자신이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소문의 내용도 놀랍겠지만, 드러나지 않는 내용은 말할 나위 없이 놀라울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관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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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격적이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면 인격이란 무엇일까? 상대방의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비인격적이라 말한다. Photo by Sagar Dani on Unsplash 어떤 신사분이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런 대화 속에서 서로간의 생각을 조화롭게 만들어 나갈 때, 우리는 인격적이라고 말한다. pixabay 나의 생각 또는 나의 상황에는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만의 것을 일방적으로 전달할 때, 이것을 주입식 교육이라 말한다. Medium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는 자녀를 대할 때, 인격적으로 대하기 어렵다. 자신이 경험한 것은 그저 주입식 교육이고 어느 누구에게서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자녀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은 단지 주입식 교육 뿐이다. 예슈아로부터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 본, 그런 간증이 있는 이들은 다르다. 이전과 전혀 다른 변화된 모습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들도 이전에는 사람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했다. 특히 자녀에게는 더더욱. 허나 예슈아를 만난 직후부터 예슈아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갈 수록 자녀를 대하는 부모된 자신의 모습이 바뀐다.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모습으로. Photo by Manu Camargo on Unsplash 인격적으로 대하는 부모란 곧 성령의 열매를 맺었거나 맺어가는 삶을 사는 이들이다. 자신이 애써서 맺은 극상품의 열매를 자녀에게 먹이는 이는 훗날 그 자녀가 성인이 되고 자신은 힘없는 노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자녀로부터 극상품의 열매를 받아 먹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부모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자녀 된 이의 참된 모습이다. 이런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진정으로 기쁘게 지켜 행하는 이들이다. 내가 예슈아를 만나 변화되어야 우리의 자녀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할 수 있고, 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