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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불편한 지체와 그를 향한 판단과 정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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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인 부분에서 치료를 받으며 약을 20여년 가까이 먹고 있는 한 지체가 있다. 공동체 안에 있다지만 대부분 어느 정도까지만 교제를 하고 그 이외에는 제한을 둔다. 물론 나 역시 그렇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그의 병력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체와의 거리두기를 하는 것과 더불어 그를 향해 난무하듯 쏟아지는 각종 판단과 정죄는 교회 공동체 안의 심각한 잘못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9:2.개역개정) 대부분은 그 지체의 행동 하나 하나에 '악한 귀신으로 부터 비롯된 행동'이라는 판단을 던졌다. 그의 정신과적 병력 역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죄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죄했다. 그런데 말이다. 정신과의 치료를 받고 있는 그 지체는 겉으로 보더라도 '약간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조차도 늘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지체는 살아 숨쉬는 그 모든 순간들이 누군가로부터 오는 판단과 정죄에 의해 고통을 받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하는 인고의 순간들인 셈이다. 사방에서 피할 수 없을 정도로 판단과 정죄가 쏟아지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우리들까지 그 지체를 향해 판단과 정죄를 쏟아내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또는 선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主님은 우리에게 판단과 정죄의 역할을 맡기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처럼 믿고 있으며 그렇게 알고 있다. 예슈아는 우리에게 그 대신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을 주셨다. 어느 것 하나 은혜를 받을 자격도 되지 않는 우리들이지만, #일만_달란트 라는 초월적 수준의 빚을 탕감해 주셨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은혜를 받았으니, 그 마음이 어찌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겠는가? 그 마음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슈아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노아의 때에 가벼운 멍에를 지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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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으로서 중간고사 또는 기말고사와 같은 시험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있어서 시험이란 '하기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험이라는 부분은 신앙인에게도 가장 듣기 싫은 말이요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시험의 때를 면해 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여기서 잠깐! '면하여 준다' 또는 '면(제)한다'라는 말은 면역에 주로 사용되는 단어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감기 바이러스가 온 땅을 휩쓸 때, 어떤 이는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지나가는 반면 다른 어떤 이는 극심한 고통과 아울러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차이는 '면역(력)'이다. 면역력이 높은 이와 낮은 이 모두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하지만 면역력이 높은 이는 바이러스의 효과가 전혀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면역력을 더 높여주는 그런 기회로 작용된다. 따라서 면역력이 높은 이에겐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그 시점이 별 문제가 되지 않은 채로 넘어가게 된다. 면역학에선 이를 두고 '면(제)한다' 또는 '면제된다'라고 말한다. 학생으로서 성실하게 공부를 한 이에겐 다가올 시험이 무섭지 않다. 물론 신중해야 함은 있다. 그러나 두려움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상황은 오지 않는다는 의미다. 반대로 평소 공부를 하지 않았던 불성실한 학생의 경우는 다르다. 시험이 무섭다. 그래서 결국 자포자기를 해 버린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받게 될 합당한 처벌' 앞에서 스스로 시인하였다. 지난 날의 불성실했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인정하였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그가 받게 될 처벌이 어떠한 것인지 알기에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고 그 두려움 앞에서 스스로 자멸하듯 저항조차

환난 날에 임할 그 시험을 준비하라.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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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은 평소 공부를 한다. 누구 하나 공부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는다. 스스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자율)의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절대로 영원하지 않는다. 반드시 주어졌던 자유에 대해 '확인받는 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것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야훼 하나님의 질서( the principle, the order, the commandments )요 만물의 이치다. 그런데 말이다. 공부를 못하는 이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시험을 준비하면 되는 지 그 사실을 모른다. 가령 수학 시험을 치뤄야 하는 상황에서, 시험에 관한 정보, 곧 시험범위와 어떻게 시험을 공부하면 되는 지에 대한 설명을 누구에게 들어야 할까? 이같은 질문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답을 할 수 있다. 가장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국어 선생님께? 교장 선생님께? 아니면 부모님께? 아니다. 담당 수학 선생님 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가 시험문제를 출제할 수 있는 ' 유일한 권한 '을 가진 분이기 때문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반드시 찾아올 것은 무엇일까? 평소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자유)를 만끽하며 살아왔다. 어느 누구도 나의 자유의지적 선택에 대해 이렇다할 반문을 하지 않았다.  왜? 그게 내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하지만 자유의지적 선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기는 영원토록 지속되지 않는다. 반드시 '나의 자유의지'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야훼 하나님의 질서로서, 내가 뿌린 씨앗에 대해 거둬들이는 추수의 때가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12:36) 이때 평가 항목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평가가 진행되는 지에 관한 '정보'를 아는 이가 있을까? 누구에게 그 정보를 묻는 게 현명하고 지혜로운 모습일까? 교회 목사님? 은사자? 아니다. 평가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