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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삶의 다른 방식을 고집한다고 자녀에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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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들의 삶을 비유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무대 위에서 바라보는 연예인들은 모두가 선하고 모두가 정의롭다. 그들의 삶은 온통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홍보대사로 선정되고 그에 맞는 활동을 펼치게 되는 경우를 몹시 자랑스러워 한다. 무대 위에 서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은 과히 세상 모든 이들에게 '인류의 평화를 위한 삶'이 무엇인지를 쉽게 보여준다. 그 후 무대에서 내려온 연예인의 삶이 간혹 매스컴을 통해 들려오곤 한다. 무대 뒤에서는 입에 담기도 어려운 온갖 혐오스러운 발언들을 서슴치 않고 퍼 붓는다거나 자신의 매니저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등 파렴치한 모습들이 자행되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려온다. 무대 위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던 모습들이 무대를 내려온 후에는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그럼 질문을 해 보기로 하자. A씨의 경우, 무대 위에서의 모습과 무대 아래에서의 모습 가운데 어떤 모습이 참된 모습이며 어떤 모습이 거짓된 모습일까? 마찬가지로 정치인에 대해서도 동일한 질문을 할 수 있다. 물론 종교계에도, 교육계에도 그렇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고 지위에 있는 이들을 보면, 대중들의 시선이 쉽게 머무는 그런 장소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너무나 자상하고 인류애가 넘치는 모습 뿐이다. 하지만 대중의 시선이 다가오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 밖에 모르는 파렴치한 모습 뿐이다. " 약자의 편에 서서 동일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 고 부르짖으면서, 삶의 은밀한 부분에서는 온갖 비리청탁과 특혜/부정 입학 등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을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 법에 어긋나지 않았어요 " 라는 말로 반성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는 뻔뻔함으로 시종일관 자신의 모습을 포장한다는 것이다. 불편하면서도 반드시 들춰야 할 내용들이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비단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 일까 하는

영적 권위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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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Payne 영적 권위라는 단어에 대해서 잘 아는 이들은 단연코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소위 권위라는 말로 주로 사용하는데, 권위자에게 순종하듯 복종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 여기면서 그와 같은 것은 즐겁게 종용한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생활을 하는 중에, 목회자 내지는 사역자 분들이 성도에게 다가와 어떤 부탁을 할 경우 '손살같이 순종'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믿음의 생활이라 모두들 그렇게 하기를 힘써 노력한다. 목회자 내지는 사역자 분들의 부탁에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니, 그 모습이 정말로 아름답던가? 우리는 목회자 내지는 사역자 분들의 부탁 또는 권면 등에 단연코 순종하는 것이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그럼 그 순종은 어디까지 진행되어야 할까? 이웃하는 교회(공동체)의 목회자에게서 옳지 못한 모습이 발견되어 세간에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하자. 그럴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교회(공동체)의 목회자나 성도들은 '자기 목회자가 그렇게 되기까지 무엇을 했을까?'라며 비난하곤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우리네들의 신앙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선 '목회자나 사역자 분들의 부탁'에 주저하지 않고 '아멘'이라 외치면서 순종하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회자나 사역자가 옳은지 혹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어느 순간에 얻을 수 있을까? 사실 목회자나 사역자의 부탁에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는 그 모습에는 '그분들의 부탁이 옳은지 혹은 그른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기회' 가 주어지지 않는다. '주저하지 않는 행동'이란 판단하지 안고 맹목적으로 행동하라는 뜻을 갖는다. 고로 우리들의 신앙은 '목회자나 사역자 분들에 대해선 일체 판단 내지는 분별하려 해선 안 된다'는 사항을 철저하게 금기시 하고 이를 불문율로 삼고 있다. 그러니 성도들은